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페미니즘이 공론화되고 있고, 공식 석상, 혹은 사적 대화, SNS상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가치관, 종교, 섹슈얼리티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중?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타자화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 각자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각자의 경험에서 비롯된 삶에 대한 믿음이 존재한다. 필자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우연히 꼭 그렇게 행동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생겼는데, 남자친구와의 다툼을 통해서였다. 많은 대화를 통해 비로소 “너의 틀림”이 아닌 “우리의 다름”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때는 하나의 생각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로웠다. 혹시 나는 자라면서 한 가지 길이 정답이라고 배우지는 않았는가? 한국의 기성세대들은 자녀세대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는가? 필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작 연인이나 자녀와 같이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이질감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은 때론 단순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기. 우리가 초등학생 때부터 많이 듣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자세로 생각해 봐도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판단을 하는 모든 과정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소통이다.

  “고전읽기와 글쓰기”라는 교양수업이 생각난다.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의 책들은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열린 마음으로 독서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책을 대할 때조차 나와 다른 관점의 책은 읽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과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완전히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의 한 부분을 인용하자면, 일부 소유지향적인 사람들은 생각을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기 때문에 다른 생각이 들어와 그것을 바꾸려고 하면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공격으로 느낀다고 한다. 소통을 목적으로 한 많은 회의와 토론들이 공격적 혹은 방어적으로 변질되는 이유라고 볼 수도 있겠다.

  현 시국과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떠올려 본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말로만 배워왔던 역지사지의 자세가 아닐까. 물질만능주의, 무한 경쟁시대, 획일화된 미의 기준, 주입식 교육, 금수저, 흙수저로 점철된 사회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열린 마음의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우리 모두의 과제를 적절한 소통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기를, 그리고 필자 본인도 어떤 자리에 있든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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