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에 들어서면, 여성 155명의 얼굴과 마주친다. 연령도, 피부색도, 머리카락 한 올의 결도 달라보이지만 눈빛은 같다. 자신의 상처를 증언하는 용기, 그 용기에 세계가 응답하리라는 믿음, 끝끝내 그곳에 남아 기다리는 자의 눈빛이다. 155인의 담대한 시선이 관람객을 맞이하는 이곳은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하 WAM)이다. 입구 앞에 전시된 성폭력 피해 여성 155명의 초상화 옆에는 이들의 이름과 피해 경험이 적혀있다.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식적으로 처음 밝혔던 김학순 할머니부터, 수요시위에 나선 길원옥 할머니까지. 우리가 익숙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름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맞은편에 위치한 WAM은 전시 성폭력 문제의 피해와 가해자료를 모아 보존하는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다. 2005년 7월 오픈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전세계 전시 성폭력 사례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WAM은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계기로 설립됐다. 여성국제전범법정은 2000년 일본여성들이 기획한 것으로, 아시아 각국의 피해자와 함께 일본군 성폭력 실태 및 ‘위안부’ 제도의 책임자를 밝혔던 재판이다. 실제 법원에서 열렸던 재판은 아니었지만 퍼포먼스 형식으로 진행해 ‘위안부’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 재판을 제안한 사람은 <아사히신문>의 마츠이 야오리 기자로,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그녀가 모았던 전시 성폭력 관련 자료와 유산이 모두 WAM 건립에 사용됐다.

▲ WAM의 상설전 코너에 있는 위안소 지도

  WAM 전시실에 들어서자 상설전 코너에 있는 WAM의 활동 기록 및 위안소 지도가 눈에 띈다. WAM의 창단 계기인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기록,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히로히토 천황의 초상화와 군인 도조 히데키 등 전범죄의 가해 당사자였던 일본 지도부 층의 사진이 전시돼있다. 위안소 지도는 아시아 전역의 위안소를 표시한 지도로,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로도 번역돼 전세계에서 발생한 전시 성폭력 발생장소와 사례들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제시된 사례들의 잔혹성은 관람객들을 경악실색하게 한다. 일본군, 미군 등의 가해자로부터 성폭력은 물론 살해, 신체훼손 등 갖가지 피해를 입은 기록들이 선연하게 나열돼있다. 우산, 콜라병 등 가해도구의 종류는 수십가지이며 훼손방식과 부분도 상식 밖의 일이었다. 성폭행 현장에서 딸을 구하려다 고문을 당하고 불에 타 죽은 어머니의 사례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WAM은 일본군의 전시 성폭력 자료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공간도 별도로 마련했다.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과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기록영상 등을 볼 수 있는 비디오 부스, 일본의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위안부’ 관련 출판물 판매 코너, 일본 정부에 제소된 ‘위안부’ 재판과 여성국제전범법정 관련자료를 볼 수 있는 자료열람실까지, 일본군 ‘위안부’에 관련한 풍부한 자료가 가감없이 전시돼있다.

  전시실 중앙에는 실제 학교에서 배우는 중등 교과서들도 전시돼있다. WAM 전시자료에 따르면, 실제 학교에서 사용되는 교과서 29권 중 13권이 ‘위안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전시된 교과서 중 한 권을 펼쳐 보니 “조선인과 중국인이 자기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일본인에 의해 끌려가 열악한 환경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며 “전쟁에서도 강제노동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으며 여성들도 이에 해당했다”고 기술돼있었다. ‘위안부’를 정확하게 지칭하거나 성노예 생활이 강제됐다는 부분은 생략돼있었다.

▲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성폭력 사례에 관한 특별전시전

  WAM은 6월26일까지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성폭력 사례에 관한 특별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오키나와와 대만, 중학생 특별전에 이은 특별전시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하기 전, 네덜란드령 식민지였기 때문에 전시 성폭력 피해자 중 일부는 네덜란드 여성이었다. 한국인, 인도네시아인, 네덜란드인까지 WAM을 통해 자신의 피해증언을 하고자 나선 여성들의 자세한 사례가 나열돼있다. 패널들 중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김복동 할머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중국,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일본이 전쟁을 치른 곳마다 짐짝처럼 끌려가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그밖에 인종을 불문하고 같은 목소리로 울고 분노해야 했던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WAM을 찾는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던 일본의 과거 역사를 알게 돼 많은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방문록에는 은폐된 역사를 마주한 일본인들의 충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역사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내용이여서 매우 충격적”, “일본 내에 이런 위안소가 있었다는 사실, 일본이 이런 진실을 숨겨왔다는 사실을 이 전시를 통해 깨달았다”는 내용들이 일본어로 적혀 관람객을 배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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