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독립선언 기념탑 1. 이화박물관 전시실 2에 있는 유관순 열사 전시 2. 독립공원에 있는 독립문 3. 약 5000장의 수형기록표가 붙어있는 민족저항실2

<편집자주>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 후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을 위해 항거하다 순국한 열사를 일컫는다. 그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1939년 11월2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1월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정했고 이후 1997년 5월에, 11월17일을 ‘순국선열의 날’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본지는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18일 이화여고, 독립공원, 서대문형무소를 찾아가 순국선열의 흔적을 따라갔다.

 유관순 열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화여고

“선생님,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왜놈에게 피살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나라에 몸 바칠 각오를 하였습니다. 이천만 동포의 십 분의 일만 순국할 결심을 하면 독립은 될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된 후 그의 스승 박인덕 여사에게 한 말이다.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이화학당은 이화여고의 전신이다. 서울시 중구 정동에 있는 이화여고는 본교 후문에서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있다. 이화여고 부지 안에 있는 이화박물관, 유관순 우물터, 유관순기념관에는 유관순 열사의 숨결이 담겨있다.

 이화박물관은 이화여고 정문에 있는 심슨기념관 안에 있다. 이화박물관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유관순 열사 교실’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당시의 책상, 의자, 실내 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다.

  유관순열사교실 맞은편에 있는 전시실 2에서는 유관순 열사의 본격적인 전시를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의 일대기와 관련 기록이 나열돼 있으며 대한민국 건국 훈장, 이화여고 명예 졸업장이 등이 전시돼 있다. 이화 배지를 단 모습, 이화학당 시절의 사진, 수형기록표 등 유관순 열사의 생전 모습이 담겨있는 사진도 있다. 다른 한편에는 태극기를 두르고 힘차게 외치는 듯한 모습인 유관순 열사의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1969년 제작돼 2006년 5월까지 유관순기념관 앞 잔디밭에 있었지만, 부식 위험, 보존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이화박물관 안으로 놓게 됐다. 현재 새롭게 제작된 동상이 유관순 기념관 앞 잔디밭에 세워져 있다.

 이화박물관 밖으로 나가 이화여고 안쪽으로 더 들어가다 보면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를 발견할 수 있다. 우물은 나무들 한가운데 둘러싸여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 맞은편에 있는 유관순기념관은 1974년 완공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통해 현재 1700석 규모의 강당으로 돼 있으며, 입학식과 졸업식이 이곳에서 열린다. 유관순기념관 안에는 유관순 열사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또한, 유관순상 시상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독립운동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독립공원

 본교 후문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인 영천시장에서 내려 정류장을 등지고 10분 정도 걷다 보면 독립공원이 있다.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공원은 독립을 위해 싸우다 옥고를 치렀던 독립 운동가의 자주독립 정신을 후손에게 기억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독립공원에 들어서면 곧바로 위엄 있는 모습의 독립문을 발견할 수 있다. 독립문을 중심으로 그 오른쪽에는 3·1 독립선언 기념탑이, 왼쪽에는 서재필 동상이 서 있다. 독립공원은 전시물들을 중심으로 양쪽에 잔디밭과 나무들이 넓게 펼쳐진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뜬 것이다. 위쪽의 아치 부분 가운데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자두꽃이 새겨져 있다. 독립문을 지나면 독립 운동가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재현한 3·1 독립선언 기념탑을 마주하게 된다. 높이 솟아있는 기념탑은 1963년 8월15일에 국민의 성금으로 탑골공원에 건립됐다가 1979년 정비 사업으로 인해 철거된 후 1992년에 이곳에 옮겨 세웠다. 기념탑 뒤에는 3·1 독립선언문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3·1 독립선언 기념탑 반대편에는 독립신문을 높이 들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바로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동상이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창간인으로, 독립협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에 여러 방향으로 도움을 준 인사다. 동상 밑에는 당시 <독립신문> 지면이 새겨져 있다.

독립 운동가들의 자취와 일제의 탄압을 담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문을 지나 쭉 걷다 보면 넓게 자리한 붉은 색 건물이 눈에 띈다. 바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많은 애국 독립 운동가를 수감했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구 서대문형무소)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등의 명칭이었으나 1998년 11월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명하고 전시관을 설립했다.

 매표소를 지나 쭉 가다 보면 전시관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다. 전시관 1층에서는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시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관련 영상을 시청할 수 있다.

  본격적인 전시는 2층에서 시작된다. 2층은 민족저항실Ⅰ, Ⅱ, Ⅲ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민족저항실Ⅰ에서는 전국 각지 의병들의 대일 항쟁에 대한 연도별 기록과 일제의 탄압에 대한 기록 등이 전시됐다. 의병장들이 호신용으로 소지하고 다닌 지팡이칼도 볼 수 있다.

 민족저항실Ⅱ에서는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면 기록됐던 건강 진단표, 신상 조사표 등을 볼 수 있다. 이후로 이어지는 추모 공간은 사방이 약 5000장의 수형기록표로 둘러싸여 있어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민족저항실Ⅲ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선어학회 등과 관련된 자료와 사형장 지하의 시신 수습실 모형이 전시돼있다. 이곳을 나와 지하 계단으로 이어진 길을 지나면 독립 운동가들을 심문하고 고문했던 지하고문실을 볼 수 있다. 독립 운동가들을 뾰족한 꼬챙이로 손톱 밑을 찌르는 고문, 벽에 거꾸로 매달고 물을 뿌리는 고문을 고스란히 재현해뒀다.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벽관과 쇠꼬챙이가 수없이 꽂힌 나무 궤짝 등 잔인한 고문 도구를 볼 수 있다.

 전시관 출구로 나오면, 전시관 다음으로 큰 건물인 중앙사가 보인다. 이 건물은 3개의 직선형 건물과 연결이 돼 있는데, 수감자들을 감시했던 당시 건물의 원형이다. 이곳에 이어진 3개의 건물은 옥사이다. 3개의 옥사 중 가운데에 있는 11옥사 입구 근처에는 ‘공작사’라는 건물이 있다. 공작사는 독립 운동가들의 노동을 강제로 착취하여 군수용품을 만들게 한 곳이다. 독립 운동가들이 노역하러 갈 때는 수중에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옷조차 입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공작사에서 서쪽을 향해 걸어가면 커다란 반구 형태의 추모비를 볼 수 있다. 추모비는 바구니처럼 속이 비어있는데, 표면에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을 판각해놓았다. 이곳은 지난 8월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찾아와 무릎을 꿇은 채 묵념을 한 공간으로 화제가 됐다.

 추모비에서 역사관 입구로 다시 걸어가면 전시관 앞에 여옥사를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여성 수감자들의 감옥이다. 8개의 수감실이 있고, 입구 우측에 있는 여덟 번째 수감실이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곳이다. 여옥사에는 여간수들이 배치됐는데, 일본인 중심이었다가 한국 여성들의 비율이 늘어났다고 한다. 일본 정부로부터 일정한 급여를 받는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이유로 한국인들에게 경쟁률이 높았다는 설명이 있어 당시 어려운 상황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여옥사의 다섯 번째 방은 거울의 방으로, 거울로 이루어진 벽면에 여성 수감자들의 사진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임지윤(교육·15)씨는 “학교 오는 길에 버스가 항상 이곳을 지나가는데 그때 호기심이 생겨 방문하게 됐다”고 방문 계기를 말했다. 연세대 최상진(신소재공학·12)씨는 “옛날 모습을 잘 간직했다고 생각한다”며 “현재 근현대사 수업을 듣고 있어 더 새롭다”고 소감을 전했다.

◆유관순상=유관순 열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여성, 여학생 또는 단체에 수여하는 상. 충청남도와 동아일보, 이화여고가 2001년 7월 공동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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