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이대학보DB

<편집자주>
그 시절 이화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본지는 이대학보 1500호 발행을 기념해 61년간의 오피니언면을 정리·분석했다. 본지 기자들이 쓰는 ‘상록탑’, 독자들의 의견을 듣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론광장’ 등 본지 오피니언면에 실린 학생들의 글을 통해 이화인들의 가치관과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보자. 2호(1954년 3월5일자) 이후의 모든 이대학보 지면은 홈페이지(inews.ewha.ac.kr) 지난 기사 보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50~1960년대 ···
여성으로서의 예절을 중시,
이화인의 배우자 칼럼도 눈길

  1950~1960년대 이화인들은 신여성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결혼과 육아는 이화인들에게 여전히 의무로 남아있었다. 38호(1958년 11월1일자) 1면 사설 ‘여성과 예절에 관하여’에는 가정과 사회 속에서 여성으로서 자세와 예절을 알려주고 있다.

  “여성의 미덕은 예절 위에서 더 한층 빛나고 높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신여성의 선도에 선 이들의 오늘에 와선 거의 다 어머니가 되어서 그 딸들을 대학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중략) 첫째 자기를 낮추는 것.  둘째 다사로운(따사로운) 마음 따뜻한 마음 스스로가 어둠에서 광명 속으로 이끌어오는 그러한 친절, 명랑히 모든 것을 뭉쳐서 표현하는 웃음. 이것은 오로지 여성만이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천부적 특성이기도 할 것이다.”

  이화인의 배우자가 기고하는 ‘사위가(街)’라는 코너도 흥미롭다. 336호(1968년 6월3일자)  4면에 실린 ‘훗날 딸과 함께 이화를’이라는 제목의 글은 본교 출신의 아내를 맞게 된 내용과 본교에 대한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화대학 출신인 아내와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이대 구내에 들어가 본 것은 이제까지 단 한번밖에 안 된다. 약 20년 전, 어쩌다 길을 잘못 찾아 들어간 것.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의 심부름으로 연희대학에 간다는 것이 건물의 생김새가 비슷하여 엉뚱하게 이대 마당 안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하여도 교통수단이라곤 전차뿐, 아현 고개를 넘으면서 샛길을 찾은 것이 산등성이가 되고 어찌하다 아담한 꽃밭이 있는 흰 돌 건물 앞에 선 것이다. (중략) ‘어디를 찾지?’ 상냥한 한 여학생이 친절히 길을 안내하여 주었다는 것이 나의 이대라는 첫 번째의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후 이대 배지에 눈이 마주치면 가슴 설레었고 그런 나의 순정이 진선미를 몸에 담은 나의 아내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이철제)

 

1970년대 ···
여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제시해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화인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상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546호(1975년 10월24일자) 3면에 있는 ‘이렇게 생각한다’ 코너에서 당시 학생 노혜정 씨는 여성들에게 당연하게 요구되는 여성상이 아닌 창조적인 여성상을 구현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지금까지 잘못 인식되어 온 고정 관념화된 여성상으로부터 해방됨에 뒤따르는 문제들 즉 남녀의 양극화, 세대의 양극화, 문화의 양극화, 빈부의 양극화 등 모든 인간의 문제를 외면하는 여성이 있다면 이는 결국 자신의 인간됨을 상실하고도 회복하려고도 하지 않는 무지 속에 재돌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77년은 본교의 전통적인 행사였던 메이퀸 선발대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해다. 584호(1977년 4월15일자) 2면 사설 ‘새로운 전통의 창조’는 메이퀸 선발대회가 여성의 성 상품화를 촉진한다고 비판했다.

  “우리는 오늘날 미스 유니버스, 미스 코리아 선발을 위시한 각종 여성미 제전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중략) 그러나 전통은 외형적 형식적인 면보다 내면적 정신적인 면의 계승에 더욱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90여 년 전 이화가 잠자는 여성사회를 깨우쳤던 선구자적 개척 정신의 계승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은 화려한 여왕대관식에서 찾아질 것인가, 아니면 ‘성의 제전’을 넘어서서 ‘지(知)의 제전’으로 승화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의 창조에서 찾아질 것인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 격동의 시대 ···
당시 사회 비판이 글 다수 차지해

  1980년대는 군사독재에 맞서고 민주주의 열망이 들끓던 시대다. 이화인들은 당시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위해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시기 본지의 오피니언면에는 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843호(1987년 6월1일자) 1면에 게재된 상록탑 ‘어머니 눈물 없이도 애국자가 되는 세상을…….’은 당시 고(故)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을 접한 후 본지 기자가 느낀 분노와 안타까움을 어머니의 편지형식으로 전달해 눈길을 끈다.

  “우리와 같은 또래의 한 친구가 죽었다. 그도 넉 달 보름 전에. 그런데 왜, 누가 그렇게 무참히 그의 생명을 짓밟았는지는 지금에야 밝혀졌다. 어쩌면 밝혀지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매일 매 순간 교차되는 삶과 죽음의 한 점 뿐일 수도 있을 터인데 유독 박종철, 그 애에게서 이다지도 처절한 아픔을 느끼는 건 그 영혼에 맺힌 한과 애통, 당부의 화살이 이 나라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돌려지기 때문이겠지.”(37기 한인애 퇴임기자)

  본지 또한 저항했다. 당시 주간 교수의 사전 검열로 1989년 4월3일자 1면 탑 기사의 제목이 나가지 못하게 되자 본지 기자들은 편집 자율권을 위해 기사 대신 대자보를 쓴다. 889호(1989년 5월1일자) 3면에는 ‘진실보도로 이화 대중신문 돼야’라는 제목으로 편집자율권 보장을 주장하는 글이 게재됐다.

  “투쟁의 승리를 통해 제도적인 억압이 철폐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대학보가 새로운 제도 하에 얼마나 새로운 내용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앞으로 본지 기자들은 이화인의 의사를 대표한다는 책임의식 아래 변혁 시가의 상황 하에서 자주·민주·통일의 대명제를 향해 대중을 선전·선동하는 기본 임무를 충실히 실행할 것이다.”  

 

1990년대 ···
정보통신에 관련한 새로운 문제 등장

  1990년대에는 PC 통신이 들어오면서 관련 문제가 이슈로 등장했다. 1006호(1993년 11월29일자) 3면에 게재된 팔복동산 코너의 ‘제한받는 자유의 의미’라는 글은 정보통신 내 게시물을 국가가 감시한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 일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한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21세기 정보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국가가 통신·전화를 통하여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면 이는 분명 도덕책에서 배웠던 북한의 5호 담당제보다 더 능률적인 감시를 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중략) 국가안보를 위해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정부는 국가안보와 정권안보의 구분부터 명확히 배워야 할 것이다.”

  PC 통신이 유행하면서 생긴 부작용을 보고 올바른 PC 통신 사용을 촉구하는 본교생의 글도 눈에 띈다. 1009호(1994년 3월14일자) 2면에 실린 여론광장에 실린 ‘PC 통신의 올바른 이용을 위하여’는 통신중독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남긴다.

  “소위 ‘통신중독자’라는 명칭을 가진 통신인구들이 늘어가면서 통신은 현실 세계와의 연관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통신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신의 종속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중략) 이러한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온라인 자살’이라 일컬어지는 PC통신을 거부하는 길까지 택하는 사람들 또한 늘고 있다. 물론 채팅은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것이 전부가 되어버려서는 곤란하다”(노승림)

 

새천년을 맞이한 이화인들 ···
취업 문제가 가장 큰 고민

  2000~2010년대로 들어서면서 본지의 오피니언면은 사회 비판보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1362호(2009년 9월28일자) 6면 상록탑 ‘당신, 행복하십니까?’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남과의 비교보다는 자신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요인은 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돈이, 키가 작다면 신체조건이, 학력이 부족하다면 준비된 경력이 아쉬울 것 아닌가. (중략) 남과 비교해 스스로를, 혹은 서로를 힘들게 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80기 황윤정 퇴임기자)

  취업은 이화인들에게 가장 큰 고민이자 새로운 사회문제로 인식된다. 1473호(2014년 4월7일자) 14면에 실린 상록탑에 ‘네모가 되어가는 우리에게’는 취업 준비로 인해 힘들어하는 이화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본래의 ‘나’는 대체 어떤 모양의 사람일까. 취업준비생에게 그건 중요치 않다. 기업이 요구하는 모양이 네모라면, 나는 네모가 돼야 한다. (중략) 자신의 모양을 기업이 요하는 대로 - 그게 네모라면 더 네모지게, 세모라면 더 세모지게 - 만들라는 말이 최고의 격려인 시대다. (중략) 우리가 각자 고유하게 갖고 있던 모양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아주 잠깐의 시간을 내어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점점 네모가 되어가는 당신은, 원래 어떤 모양이었는지를.”(88기 이도은 퇴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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