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방학 며칠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야기 하나 할까요? <미생>, 작년 가을에 했던 드라마, 소문 들었나요? 나는 ‘본방’은 보지 못하고, 방학동안 20회를 주야장천 보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아깝진 않았어요.

  바둑에 인생을 걸었던 청년 장그래가 프로기사로 입단하지 못하고, 고졸 검정고시라는 자격만 갖고 대기업에 인턴, 그리고 계약직으로 2년을 보내는 과정을 담은 내용이죠. 토플, 토익, 제2외국어, 어학연수 등의 스펙 하나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지요. 수많은 실수로 좌절하고, 주변의 무시하는 시선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죠. 그가 아는 것이라곤 바둑판에서 배운 것 뿐 이거든요. 장그래는 자문하죠. '실패했던 바둑에서 배웠던 원리를, 지금 성공하려고 하는 상사맨의 삶에 적용해도 되는가' 하고. 그런데 성공했건 실패했건, 그리고 프로기사건 상사맨이건, 농부건 교수건, 깊이 들어가면 누구나, 저변을 흐르는 삶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고 생각해요. '미생'이란 두 집을 짓지 못해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상태, 즉 상대로부터 언제든지 공격받을 여지가 있는 상태를 뜻하는 바둑용어라죠. 누군가의 공격이 아니라도, 생로병사 등 끊임없는 공격과 마주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미생인 셈이죠.

  드라마 제작의 형식적 원칙은 리얼리티죠. 철저하고도 섬세한 장면 재현은 감동적이었어요. 연출자와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과 스텝들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구나 싶으니 말이에요. 그래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이정도만 해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내용의 측면에선 보는 사람마다 각기 느낌도 해석도 다르겠지요? 이 시대의 직장인들, 특히나 ?상사맨?들은 그들이 매일 살아가는 ?포성 없는 전쟁터?에서 벌인 무훈담과 실패담으로 목청을 높일 거고, 회사 내의 남녀, 상하 사이의 복잡한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할 테고, 또 젊은이들은 취업난에 계약직의 문제 등 각자 많은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꽂힌다'하듯이, 내게 꽂힌 이야기를 해보죠. 13편 마지막 부분이었어요. 장그래의 독백으로 보들레르의 산문시 <취하라>가 나오는 거예요. 보들레르라 하면 프랑스 현대시의 시조죠. 우리학교의 교양과목<기초 프랑스어 II> 교재에도 실려 있어요.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 19세기 중반 산업화 시대, 정신적 방황 속에서 이상향을 꿈꾸었던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의 구원 방책이었죠. 보들레르는 술에만 취하는 게 아니라 시에도, 미덕에도 취하라고 해요. 내적 균형을 맞추자는 거죠.

  그런데 ‘취하라’고 독백했던 장그래에게 ‘취하지 않기’라는 전혀 다른 균형추가 제시돼요. 장그래는 계약직임에도 불구하고 '판을 뒤흔드는' 발상의 전환으로 회사의 보수적 관행을 무시하고 일을 벌려 쾌거를 거두죠. 장그래는 ‘이렇게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나?’ 은근히 꿈도 꾸죠. 하지만 장그래가 취해서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환상 속에서 헤매지 않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그의 상사 ?오과장?이예요. 장그래가 허망한 꿈에 빠져들까 걱정했거든요. 꿈꾸고도 꿈꾸지 않는 것, 취하고도 취하지 않는 것, 장그래도 알고 있는 삶의 지혜였어요. 조치훈 9단이 했던 말,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을 돼내었던 그였으니까요.

  그대는 자기가 하는 일과 노력이 '그래봤자 바둑'이라고 좌절하고 포기할건가요? '그래도 바둑, 내 바둑이니까'라며 꿈꿔보지 않겠어요? 각자 자신의 미덕에 취해보지 않겠느냐 말이에요! 사족 하나. '그래봤자 바둑'이라는 것도 잊지는 말아요. 이 둘의 끊임없는 반복이 우리의 삶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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