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과의 썸, 자유로운 삶 위한 열쇠가 될 수 있어"

  1992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뉴욕 맨하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유엔본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지금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배낭여행을 떠났던 나는 당시 바로 직전이었던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유엔을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지만, 분단의 아픔으로 인해 우리는 구소련이 몰락한 다음에야 유엔 가입이 이뤄졌다. 케냐에서 온 자원봉사자로 기억되는 어느 흑인여성의 설명을 들으며 유엔 본부 건물 투어에 참여했었다. 그러다 총회장이 있는 건물의 2층 이었던가 3층 이었던가, 아무튼 어느 복도에서 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커다란 그림 4점이 내용의 연속성을 보이며 걸려있었는데, 인류가 최초 생겨난 모습, 서로의 이기심 속에 다양한 문화가 성장하는 모습, 그러다 서로 처참하게 다투는 모습이 각 그림 속에 담겨 있었고, 마지막 그림에는 서로 화합하고 타협하는 지혜를 발견하고 평화를 찾아간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난 정확히 22년전 이 그림 4점을 본 순간부터 ‘낯선 세상’과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썸을 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무조건 외교학에 대한 동경과 꿈을 품고, 국제정치를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조금 장황한 설명이었지만, 지금부터 20여년전 당시 내가 낯선 세상과 썸타기로 결심한 그 상황이 바로 오늘 이 순간 이화의 학생들에게 국제정치학을 가르치는 인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난 그 4점의 그림이 20세기의 거장 피카소의 작품이란 걸 알게 되었고, 이후 다짜고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몹시도 낯설었지만 외교학이란 분야를 새롭게 전공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얘기지만 피카소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썸탔다’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지만, 예전에도 “썸씽이 있다”는 말이 누군가와 연애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곤 했으니, 아마도 짐작컨대 우리는 영어의 ‘some’ 혹은 'something'을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누군가와 '썸타게' 된다면 아마도 대부분 행복하고 야릇한 감정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 상대를 더 잘 알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며, 또 그 상대를 나의 소유로 만들고자 더 정성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썸을 타야할 대상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건강한 판단력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다양한 대상을 상대로 썸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이화인 여러분, 세상과 ‘썸타’ 보지 않을래요? 피카소의 그림을 본 순간 내가 국제사회의 수많은 낯선 외교 사건들과 ‘썸타’ 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처럼, 여러분들께도 새로운 세계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썸타 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자주 해외에 나가는 편이지만, 정말 외국을 방문하는 매 순간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어느 기업인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우리는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대한민국에 태어났다. 이제는 이화 캠퍼스 안에도 외국인 유학생이 많아서, 이런 식의 표현이 다소 근대성에 매몰된 발언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부지런히 움직이며 우리 바깥 세상의 다양한 대상을 상대로 ‘썸’을 타야만 더 잘 살고 또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여성은 특히 새로운 문명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더욱 적극적이고 개방적이라고 한다. 우리 이화인의 DNA에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세상에서 가장 글로벌 지향적인 유전자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이제는 피카소의 그 작품이 더 이상 전시되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뉴욕메트로폴리탄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원래 ‘썸탄’ 대상은 나에게 성숙을 안겨주고 홀연히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유쾌하게 웃으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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