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일하게 된 학원이었다. 낯선 사람들 뿐 이었다. 일하는 내내 분위기는 냉랭했다. 업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면 서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다. 먼저 다가가 말을 붙이기도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책상 정리를 하던 중 같이 일하는 사람의 인적사항이 적힌 쪽지가 눈에 띄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이었다. 무작정 다가가 말을 붙였다. “벗이세요?”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를 46cm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46cm의 안쪽은 친밀함의 범위이다. 같이 살을 맞대고 부대낄 수 있는 사람을 두는 거리인 것이다. 반대로 나를 방어하고 싶을 때나 상대를 멀리할 때에는 46cm 밖에 둔다. 항상 붙어 다니던 연인들이 싸운 뒤 멀찍이 떨어져 걷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거리는 물리적이지만 또한 심리적인 수치이기도 하다.
 
  이화에 들어온 뒤로 벗이 입에 붙었다. ‘벗’은 46cm의 거리를 참으로 쉽게 허무는 능력이 있다. 시험기간 열람실 책상에 종종 놓이는 옆자리 벗의 초콜릿이 그렇다. 벗, 하고 부르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그대들의 모습이 그렇다. 벗으로 우리는 통한다. 통성명을 하고 눈인사를 하는 모든 절차를 생략해도 서로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낯선 곳에서도 벗을 알아보았던 만큼, 벗의 진가는 교정 밖에서 드러난다. 학교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46cm가 아닌 46m의 거리를 두며 스스로를 보호한다. 참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 많은 세상이다. 잔뜩 날을 세우고 나의 사방으로 46cm를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한다. 하지만 잔뜩 들어간 긴장감도 벗이라는 말에 쏙 들어가 버리고 없다. “벗이세요?”하는 물음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던 그 동문의 얼굴도 그랬다.

  벗이라는 단어 하나가 심리적 거리를 순식간에 좁힌다. 그것은 이화인만이 갖는 동질감 일테다. 팔을 뻗어 악수하는 것 보다 가까운 거리다. 서로 본 적이 없는 사이임에도 이미 가깝다. 쉽게 다가올 수도, 다가갈 수도 있다. 이화인만의 특권이라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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