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에 개최된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우리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김연아 선수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우수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은메달을 받게 되자 모든 국민들은 아쉬움을 넘어서 분노를 느끼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번이 김연아 선수의 은퇴 경기이기도 하였고, 또 그녀의 우수한 성적을 우리나라의 자부심과 동일시하면서 경기를 시청하던 국민의 감정이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에게 이입 되어서 더욱 더 억울한 심정이 된 것 같다.

  김연아 선수가 은메달을 받게 된 후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우리 국민에 대한 기사가 뉴욕타임즈에 실렸다. 이 기사에서 ‘한국민들은 정량화된 결과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 수, 심지어는 자살률 순위 등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한다고 하였다. 이 기사를 보면서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계속 그곳에 살고 있는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한국에 출장와서 만난 사람들이 자기들의 생활수준을 숫자로 이야기하고 남들과 비교한다고 한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평수가 27평인지 아니면 38 평인지, 또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배기량이 1500 cc 인지 3000 cc 인지를 서로 비교한다고 한다. 우리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끼리 아파트 평수를 비교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아파트 평수에 집착하는 부모들의 태도가 자녀들에게 그대로 전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높아서 경쟁이 치열한 사회가 된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 성적 순위 경쟁에 진입하여, 주변의 잘난 엄친아/엄친딸과 비교당하게 된다. 유치원부터 고교시절까지는 명문대 입학에 초점이 맞추어져, 내신 성적과 수능 성적을 올리기 위한 무한 경쟁에 시달리면서, 친구를 배려하고 함께 공부하는 분위기 보다는 서로 견제하는 분위기에 휩쓸리게 된다. 입시철이 되면 학과별 커트라인을 기준으로 한 각 대학의 순위 비교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또 종합일간지에서의 대학별, 학과별 평가에 대학들이 일희일비하기도 한다. 우리 학교를 포함한 우수 명문대에 매년 수석합격자가 있고 수석 졸업자가 있지만 이들이 특별히 행복하거나 우리나라나 제3세계를 위하여 큰 공헌을 한 업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명문대 입학을 위한 지식이나 토익 만점의 지식은 스타강사 김미경의 표현대로 ‘네이버 이하’이어서, 창의력이 없이 USB 메모리 한 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보를 외우고 있는 인재는 학점이나 영어 점수에 관계없이 이 사회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잉여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사회에는 열정과 창의성과 협동력이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 창조적인 연구를 하기 위하여 동료 연구자들과의 협동이 필요하고, 서로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배우는 자세가 정말 중요하다. 최근에 강조되고 있는 융합연구는 연구자들 간의 존중과 신뢰에서 시작된다. 전자공학과 소속의 우리 연구실에서 지난 십여년 간 화학과, 신경과, 피부과 교수들과 공동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공동 연구자와의 의사소통은 기본이며, 그들의 관점과 그들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도 맡은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여 상대방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융합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큰 이유는 학생 시절과 취업준비까지의 대부분의 시절을 다른 사람들과 협조하지 못하고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지냈기 때문일 것 같다.
 
  교정에 목련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목련 한 송이가 먼저 피거나, 다른 송이보다 더 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러 송이가 함께 어우러져서 더욱 더 아름다운 것이다. 또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가 서로 다르지만 우열을 가리지 않고 함께 피어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제 대학 생활을 시작한 신입생부터 졸업반 학생까지 모두 다 순위 경쟁 사고체계에 갇혀서 소중한 친구들을 학점경쟁 상대로 보지말고, 힘을 합쳐서 어려운 일들을 함께 극복하고, 새로운 일을 창조해낼 동반자로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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