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노조 관련 기사를 많이 써서 당연히 그쪽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후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념, 종교 등 누군가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는 부분에 대해선 각별히 언행을 조심하는 터였기에 누군가가 내 ‘성향’을 추측했단 것은 그것이 어떤 방향이든 신선한 충격이었다. 추리의 근거는 더욱 흥미로웠다. 다름 아닌 노동 관련 기사를 많이 써서였다. 
 
 학보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노동이나 단체행동 같은 것에 전혀 관심 없었다. 작년 9월, 우연한 기회에 본교에서 일어난 주차경비노조 파업을 취재했고, 그 후 학교 노조 사정에 관해 남들보다 ‘약간’ 더 안다는 이유로 학내 노조를 취재처로 맡았다. 학교, 용역업체,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삼각관계를 넘어서 서울 내 대학가 전반에 번진 파업 문제를 취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들의 팽팽한 갈등 관계를 다루다 보면 ‘어느 한 쪽 쪽으로 기운다’는 욕을 먹기도 십상이다. 머리 아프고 복잡한 노동 문제, 비겁하지만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바로 그 시절 ‘노조’에 느꼈던 ‘두려움’과 ‘속 시끄러움’이 어쩌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을까. “평소 노조 관련 기사를 많이 써서 당연히 그쪽인 줄 알았다”는 누군가의 말에 ‘그쪽’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는 누구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유난스럽고 언쟁적인 이미지의 그들. 안정적이고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언가 불편한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최근 이들의 움직임에 정치권까지 합세하며 ‘노동’이란 영역은 왼쪽에 서 있는 누군가가 지켜내야 할 이미지로 굳어져버렸다.

  하지만 우리사회가 ‘노동’을 암묵적으로 왼쪽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현상에 대해선 고민해 봐야 한다. 언제부터 계층적 갈등을 표현하는 말이 ‘왼쪽’이 짊어지고 가야할 문제로 기정사실화됐을까. ‘파업, 단체행동, 노동’ 다분히 투쟁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단어들이지만 사실 노동자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흔히 기득 세력이라 일컫는 대기업이란 곳에서도, 뭐든지 아래로 내려다 볼 것만 같은 화이트칼라 집단에서도 항상 계층적 갈등은 일어난다. 학보사에서 기자로 일을 하다 부당한 일을 겪었다면, 이 역시 노동권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될 수 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그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인 정치 언어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채색돼 있다”고 말했다. 그의 사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으나 이 글귀를 읽으며 한국의 노동권을 취재하던 시간을 떠올렸다.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인민, 민중, 계급, 노동’이란 단어에 예민한 듯하다. 이런 생각에는 노동의 가치를 낮게 보는 오만한 시선과 우리 사회를 장기간 지탱해온 특정 이데올로기와 강력하게 연결돼 있으리라.

 밥 먹자 도리깨 잡고 마당에 나서니 검게 탄 두 어깨 햇볕 받아 번쩍이던 주체 못 할 건강미! 그 옛날 우리 조상이 사랑했던 노동은 어떠한 편견과 이념도 스며들어 있지 않은 순수 그 자체였다. 넓은 의미에서 사실 우리 모두는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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