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y Path College


  얇은 분홍빛 커튼을 통해 환한 햇살이 비추었다. 열 개도 넘게 맞춰 놓은 알람은 제 임무를 다 한지 오래였지만 나는 여전히 이불을 푹 덮어쓴 채 꼼지락 대고 있었다. 12시에 데리러 오겠다던 카운슬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도착 첫 날부터 오리엔테이션이람. 겨우 몸을 일으켜 대충 옷을 걸쳤다. 약속 시간이 되었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잠시 숨을 죽였다. 방에 없는 척 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었다. 너무 피곤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두려웠던 걸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원체 소심한 나였지만 곧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같이 수업을 듣고 밥도 먹고 저녁에는 쇼핑도 가는 등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매주 내가 참석하길 기다리는 동아리도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외로웠다. 함께하는 시간들은 우정보다 어수룩한 외국인에 대한 호의로만 느껴졌다. 어느 아침, 등교 준비를 하던 중 이제 '나'는 사라지고 '외국인'만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원피스를 꺼내 입고 오랜만에 공들여 화장도 했다. 다시 자신감 가득한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늘이 높고 파랗던 가을날이었다. 오늘은 전혀 새로운 날이 될 것이라 각오를 다지며 기숙사를 나섰다. 캠퍼스에서 처음 보는 많은 사람들이 내게 오늘 예쁘다며 말을 걸었고 나도 어색하게 웃는 대신 고맙다고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내게 여유가 생기니 주변의 모습들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외국인'이라는 벽 속에 나를 가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미 모두가 나에게 손을 내민 채 어서 적응하기를, 자신감을 가지고 벽을 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봄 학기가 시작하면서 나는 학교 뮤지컬에 참여하게 되었다. 좋아하던 작품이기도 했고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으리란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의 목표와 달리 뮤지컬 연습을 하는 내내 나는 다시 조용한 외국인이었다. 내겐 어떤 역할도 주어지지 않았고 배로 활발한 배우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힘들었다. 감독님께 서운함마저 들었다. 몇 번이나 그만둘까 고민하던 중 나는 드디어 한 줄의 대사를 얻었다. Act 1 Scene #의 마지막. 기자들이 각자의 뉴스 헤드라인을 외치며 달려 나가는 장면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고 무대 한 가운데서 뜨거운 조명을 받으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Roxy's down fall!” 잠시 정적이 흘렀고 어두워진 스테이지로 감독님이 올라오셨다. 뭔가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며 방금 내질렀던 목소리에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잔뜩 움츠린 나를 감독님은 꼭 안아주시며 말씀하셨다. “You are really awesome, little lady.”

  “Minji!!" 대답이 없자 다시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피곤해서 그냥 쉬겠다고 말할까? 복잡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카운슬러와 학생회장이 햇살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띠고 나를 반겼다. 나보다 더 들뜬 모습으로 빨리 밥을 먹고 캠퍼스 투어를 하자고 재촉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활짝 웃으며 그들을 따라 나섰다. 장거리 비행에 지친 몸도, 서툰 영어 때문에 불안한 마음도 잠시 잊기로 하였다. 지금 따라 가지 않으면 영원히 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다시는 내 방문을 두드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만난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꿈같은 1년을 보냈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는 매력적인 세상에게 대답하는 법을 배웠다. “Yes, I’m 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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