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금의 쿨한 사회에서 올바른 앎 지행해야”


  분명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실제로 무지를 말하는 것은 때때로 그 자체로 한 계층을 겨냥한 차별로 이어질 여지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일이다. 무지를 적극 배격한 근대의 계몽주의는 결국 실패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무지는 개선해야 하는 상태며, 학생이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최근 무지는 개선하기 어려운 상태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 각자의 단말기를 가지고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는 서버에 접속할 수 있다. 단말기는 초마다 갱신되는 타임라인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나르지만, 엄지로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흘러가는 정보를 모두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쉽게 알고 쉽게 잊어버리게 돼 앎과 모름의 경계가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점점 알기보다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달하기 쉽게 손질돼 공유된 정보는 널리 퍼질수록 힘을 얻지만, 파급된 정보의 힘은 정보 자체의 진실함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정보의 수원과 지류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치명적일 때가 많지 않다는 점은 우리를 점점 더 무지를 경계하지 않게 만든다.

  모르는 것을 경계하지 않고 선입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현실과 이상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싶다는 당연한 마음을 올바른 앎이 뒷받침하지 못할 때 의지는 무지와 함께 허세가 되고 아집이 된다. 이런 때에 선호되는 정보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연성 정보(soft information)다. 알고 있는 것과 사실이 다르더라도 가시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가벼운 정보기도 하다. 이런 정보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많은 정보에 취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새로운 소식에 둔감해지고 자극의 역치가 높아진 사회는 점점 쿨하게 흘러간다.

  사회가 쿨할수록 언론은 대중에게 앎과 모름의 상태를 진단하는 기준이 돼야 한다. 신문이 등장할 때는 소수에게 독점됐던 정보를 다수에게 나누는 장치였고 맥루한이 신문을 핫 미디어로 분류할 때는 대중을 뜨겁게 만드는 매체였다. 지금의 신문은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지 않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이를 편집해 효과적으로 전달할 의무가 있다.

  학생사회에서의 언론의 역할도 다르지 않다. 지금의 학생사회에서 등록금이 지나치게 높은 상황을 고쳐야 한다는 의지는 사람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의 스무 해를 가깝게 반복된 이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지루한 내용으로 느껴지고 만다. 구성원이 평균 5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는 학생사회에서는 이슈도 수명이 짧다. 학점이월제는 2005년 처음 총학생회 공약에 등장한 이후 마침내 작년 7년 만에 시행됐지만, 당시의 구성원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이슈가 제기되고 내용이 충분히 대중에게 공유되지 못한 것이다. 현재의 자치활동지원위원회나 등록금심의위원회도 그렇다. 현재 학생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학생 대부분은 충분히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며 또한 자신의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언론은 대중의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앎에 대한 가치를 수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최근 학내 언론의 역할이 고민되는 가장 큰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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