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변에서 한강처럼 흐르는 서울만의 상식, 그 속에서 진짜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 찾길

이진송 국어국문학과·07

가을학기다. 필자는 그간 적립한 채플이 3개나 있다는 사실보다, 새로 머물 집을 구하는 것이 더 큰 근심이었다. 부동산 사이트에는 문의가 넘쳐나고 방이 나왔다는 게시판 글은 조회수가 높았다.


그렇게 치열하게 ‘집’이 아닌 ‘방’을 찾던 이화인들 모두, 피곤한 몸을 누일 공간을 찾았을까. 집안의 사정과 자신의 편의를 가리는 가혹한 저울질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일 것이다.


최근 등록금과 관련하여 지방 출신 학생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는 기사가 자주 눈에 띄었다. 서울 생활에서 본가의 화장실만한(진짜?) 방은 시작에 불과하다. 서울이라는 도시 특유의 문법이 마치 통과의례처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원주민들이여, 기억하는가?


“집에 간다”는 말에 시골 가냐고 물으면, 그대의 ‘시골 친구’는 번개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시골 아니거든.”
다른 지역을 모두 ‘시골’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어 분류하는 방법은 편리할지언정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 것’과 ‘~이 아닌 것’으로 대상을 이분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그러나 서울은 그 자체로 권력을 행사한다. 상경한 지방 학생들이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표준어의 장벽이다. 모든 기회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지방 혹은 ‘서울이 아닌 곳’은 ‘낙후된, 열등한 곳’의 의미로 탈바꿈한다.


사투리, 즉 다른 언어는 이방인의 표식이다. 나고 자란 곳에서 자연스럽게 쓰던 말이 갑자기 낯설어진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말투를 흉내 내거나 길가는 사람들이 돌아보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면, 대다수의 학생들은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의 말’을 따르게 된다.


처음 미팅을 할 때 남학생들이 굳이 자신의 주소를 밝히며 우쭐대던 일이 기억난다. 서울의 특정 지역이 상징하는 바를 재빠르게 포착하고 걸맞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지방 출신의 여학생들을 촌스럽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세세한 지명이 자신을 소개하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어디에나 격차와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서울은 유독 극단적이고 근원적인 경우가 많다. 가장 달콤한 부분과 가장 씁쓸한 부분이 공존하는 기묘한 디저트 같다. 그러니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증명하는 일은 서울 원주민인 그들에게 매우 당연했으리라.


서울만의 상식이나 질서는 저변에서 한강처럼 흐르며, 내부의 구성원을 판정하고 선별하여 배척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는 더 이상 지방 출신 학생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너나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여 글로벌 리더의 화상을 부채질하지만 등록금 부담을 덜 대안은 발견되지 않는다. 여성이 행복한 도시라고 광고하는 지하철 전광판 아래서 성추행을 당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만 집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가장 똑똑한 세대라는 찬사와 가장 불쌍한 세대라는 동정 사이에서 우리는 갈팡질팡한다.


많은 이들에게 이곳은 철저하게 ‘달콤한 당신들의 도시’이다. 일부를 제외하면 꼬치에서 좋아하는 것만 빼먹듯 서울의 특혜만을 만끽하는 사람은 드물다. 설령 태어나고 자란 원주민일 지라도, 이방인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전쟁터 같은 정글에서,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긴 여름방학 동안 여러 날을 자기혐오 속에서 지냈다. 누군들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시작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조만간 과제가 비처럼 내리고, 시험과 팀플 때문에 머리가 빠질 게 뻔한 데도 말이다.


‘약속의 땅’이었던 서울이 실상은 하나도 달콤하지 않더라도, 이제 다시 견디고 때로 맞붙고 자주 나가떨어지며 자신만의 수레바퀴를 돌려야 할 시간이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가 태어난다. 진짜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이번 학기에는 저마다 빛나는 것이 늘었으면 좋겠다. 거대한 도시의 등쌀에 못 이겨 비틀거릴 때,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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