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교 복개부터 로스쿨 신설까지…신문 활자에 담긴 이화 21세기 첫 10년

본지는 1391호(2010년 12월 6일자)를 끝으로 올해 신문 제작을 마친다. 본지는 1150호(2000년 2월 12일자)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241호의 신문을 발행했다. 올해 신문 종간을 맞아 본지는 11년간 본지가 보도한 기사와『이대학보 사진으로 보는 이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해 이화의 21세기 첫 10년을 조명해봤다.

△이화교 복개, 인터넷 활성화로 새로운 모습 갖춘 이화…21세기의 시작 2000년~2002년
2000년~2002년은 본교의 캠퍼스 지도가 바뀐 시기였다. 2002년 9월부터 이화교 철거 작업이 시작돼 1958년 이화교와 함께 만들어졌던 정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화교 복개 작업은 조용히 진행되지 않았다. 이화교 복개에 대해 학교 측과 총학생회(총학)가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본지 1192호(2001년12월3일자) ‘복개 두고 팽팽히 맞선 학교·총학’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총학은 지난 10월 ‘학교 측 이화교 복개 논리 허구로 드러나다’라는 제목으로 1천100명의 이화인과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에 학교는 총학이 보낸 이메일 내용에 대한 해명 메일을 오늘 1천100여명의 이화인에게 보낼 예정이다.

2001년 본교는 여대 최초로 반(反)성폭력 학칙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려대 학생들이 1996년 대동제 때 본교생을 성추행한 후 나타난 일이었다. 반성폭력 학칙은 2001년 5월 제정된 후 2003년 2월7일 개정됐다. 당시 반성폭력 학칙 개정의 필요성은 본지 1190호(2001년11월19일자)에 실린 ‘‘반성폭력학칙’, 현실과 동상이몽’ 기사의 우이현주(철학·02)씨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우씨는 “지금의 학칙 상으로는 본교 학생은 외부 가해자 등에 의한 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다. 학생들의 의견을 학칙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인터넷 사용이 활성화됨에 따라 2000년대 초 이화의 온라인은 변화를 겪었다. 본지 1152호(2000년3월13일자)에 실린 ‘‘나만의 ID’@ewha.ac.kr 만드세요’ 기사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ID로 학교 메일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을 보도했다. 본지 1186호(2001년9월24일자) ‘클릭! www.ewhaian.com’ 기사에서는 본교 커뮤니티 이화이언(ewhaian.com)이 2001년 5월22일에 만들어졌음을 보도하고 있다. 

△나이 많은 새내기 들어온 이화… 학교 주변 상업화로 논란 겪기도 했던 2003년~2005년
2003년에는 본교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풍경도 변화했다. 2003년 11월 서대문구청이 본교 앞거리를 ‘미용특화거리’로 지정하면서 본교는 외부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본교 앞에는 ‘파비’, ‘밀리오레’등의 대형 쇼핑몰 공사가 시작됐으며 이에 대해 교수와 학생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2003년 11월 6일~7일 444명의 이화인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대 앞의 상업화’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62.8%(279명)가 ‘교육환경을 위해 상업화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본지 1243호(2004년5월3일자) ‘학교 앞 교육환경 우리가 지킨다’기사는 당시 교육환경을 지키고자 했던 본교의 움직임을 담아냈다.

신촌지역 4개대학(이화여대·서강대·연세대·홍익대)연합·교육환경을 위한 교수모임·학교 앞 미용특화거리 지정을 반대하는 연대모임 외 6개 단체는 4월28일(수) 정오∼오후1시 이화광장에서 ‘신촌대학가 교육환경 수호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었다. 6개 단체는 ‘우리의 힘과 꿈으로’라는 제목 하에 개회선언·결의문 채택·평화 행진 등을 진행했다.

2003년 1월22일에는 1964년 제정된 후 57년 동안 본교에 뿌리내리고 있던 금혼 학칙이 폐지됐다. 금혼 학칙 폐지로 인해 결혼을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던 30대~70대 학생 20명이 2003년 재입학할 수 있었다. 44년 만에 본교로 돌아온 박영(간호·03)씨는 본지 1232호(2003년11월10일자)에 실린 ‘44년간 소망해 온 이화에서의 일상’ 기사에서 “학교생활은 너무나 오랜만에 찾아온 은혜로운 기회”라고 회상했다. 박씨는 “첫 채플 듣던 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며 “뒤늦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금혼학칙 폐지로 2005년 1학기까지 박씨 등 본교생 52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국제화 성과, ECC 건축 등의 성과 이룬 2006년~2008년
본교는 2006년~2008년 상당한 국제화 성과를 이뤘다. 본교는 2006년 ‘이화 글로벌 파트너십 프로그램(EGPP)’을 시행했다.

2006년 EGPP 학생으로 본교에 온 와자삿 타차폰(언홍영·01)씨는 본지 1284호(2006년3월20일자) ‘이화에서 당찬 꿈을 펴는 다국적 학생들’기사에서 “언홍영 공부를 마친 후 본국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국제화의 일환으로 진행된 ‘글로벌 이화 2010 프로젝트’도 2007년 실시됐다. 프로젝트의 시행으로 국제교류처가 신설되고 세계·국내 석학들의 공동연구기관 이화학술원이 설립됐다. 글로벌 전문 인재를 육성하는 스크랜튼대도 신설됐다. 

2008년 2월에는 본교의 랜드마크 건물 ECC가 완공됐다. ECC는 ‘제26회 서울시 건축상’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서울시 건축상 김형우 심사위원장은 본지 1344호(2008년11월17일자) ‘혁신적인 캠퍼스 모델 ECC, 도시와 캠퍼스 이은 열린 공간 조성하다’에서 ECC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눈에 보이는 건축이 아니라, 건물이 없는 풍경, 계곡만 있는 풍경을 새롭게 시도해 혁신적인 캠퍼스 모델을 제시하는 등 우리의 도시건축디자인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로스쿨 신설, 스크랜튼 후손 방문…2009년~2010년
작년 3월 첫째 주에는 본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문을 열었다. 서울대 출신 위정원(약학·08년졸)씨는 본지 1349호(2009년3월9일자) ‘예비법조인 100명 이화에 입학하다’기사에서 “이화여대 로스쿨의 특성화 분야인 생명윤리법 등을 통해 학부 전공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했다”고 포부를 밝혔다.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는 남성 3명은 작년 9월8일 본교 로스쿨을 대상으로 헌법 소원을 냈다.   

작년 10월 5일에는 스크랜튼 선생의 후손이 본교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스크랜튼 4대 후손 케빈 게일씨는 본지 1364호(2009년11월2일) ‘스크랜튼 정신의 업적과 정신, 후손들에게 물려주겠다’ 기사에서 스크랜튼 정신을 후손에게 알려야하는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본지는 21세기 첫 10년 동안 이화교 철거부터 로스쿨 설립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화를 지면에 담아왔다. 내년 봄부터 이어질 이화의 또 다른 미래도 어떤 모습일지 본지를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신사임 기자 ssistory@ewhain.net
사진 출처: 본지 및 홍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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