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에는 도전정신을 지닌 연극인들의 실험장, 80년대에는 청년들의 시대에 대한 저항정신 표출 창구…2010년 아트레온 시어터, 더 스테이지로 공연문화 재부흥 꿈꾸다

작년 신촌에 새로 들어선 소극장 ‘더 스테이지(THE STAGE)

<편집자주>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기존 연극운동의 중심적 위치에 있던 신극에 대항해 ‘소극장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소극장 운동의 전개는 각 지역 소극장의 확산을 유도했으며, 신촌 지역 소극장 역시 1970년대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왔다. 본지는 신촌 지역 소극장들이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걸어온 길을 짚어보고 신촌문화의 변화상을 살펴봤다.

 

신촌 속 크고 작은 소극장들은 신촌 공연문화의 50년 변천사를 담고 있다. 1970년대 신촌 소극장들이 젊은 연극인들의 도전정신과, 실험정신을 담고 있었다면 1980년대 소극장들은 시대에 대한 저항 정신과 젊음의 열기를 담고 있었다. 1990년대의 침체기를 지난 신촌 소극장은 이제 2010년 새로운 역사를 담기 위해 발돋움 중이다.

 

△1970년대 카페와 소극장, 실험정신 지닌 젊은 연극인들의 연습무대
1970년대 신촌지역 카페와 소극장은 실험정신을 지닌 젊은 연극인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였다.

1960년대 후반 소극장 운동을 벌인 젊은 연극인들은 상업극단에 비해 작품의 소재나, 표현 측면에서 과격하고 대담했다. 이들은 기존 상업극장의 통속성, 흥행본위의 작품 선택 등에 반격을 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의 새로운 움직임은 당시 1960~1970년대 부족한 극장 수와 비싼 대관료를 해결하지 못해 난관을 맞이했다. 연습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연극인들은 다방, 카페, 술집 등 장소를 개의치 않고 연습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1970년대 초 본교 정문 옆 건물 2층에 위치했던‘파리 다방’역시 연극을 올리고자 하는 연극인들의 무대가 되곤 했다. 무대 장치가 따로 마련되지 않은 카페에서 젊은 연극인들은 빌려온 몇 개의 기본 조명기들로 불을 밝혀 공연을 진행했다.

신촌에 소극장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74년 4월이다. 본교로 통하는 대로변 건물 3층의 ‘민예소극장’은 극단 ‘민예’에 의해 개관됐다. 40평 남짓한 작은 소극장은 단원들이 자신의 색채를 키워나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전직 민예극단 단원 이대근(서울시 종로구·67세)씨는 “1970년대는 공연장이 부족해 극을 올리지 못하는 극단들이 허다했다”며“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극단 민예 활동의 초점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새로운 민족극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민예의 창립공연은 ‘고려인 떡쇠’(김희창 장, 허규 연출)였다. ‘고려인 떡쇠’에서 민예는 고려인의 민족 주체성이라는 주제를 현대적 연극기술로 풀어내고자 노력했다.

극단 민예는 1977년대 후반 재정난으로 문을 닫게 됐다. 교육과 실험을 위한 용도로 극장이 운영되다보니 관객을 끌기 어려웠고, 다른 지원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2년 뒤 상업은행의 후원을 받게 된 민예소극장은 1979년 3월15일 본교 정문 앞에 다시 개관했다. 민예소극장은 재개관 이후 ‘서울말뚝이’, ‘놀부전’, ‘춤추는 말뚝이’ 등의 전통극 시리즈를 공연하는 동시에, 신인극작가들의 창작 단막극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며 소극장의 다변화를 꾀했다.

△1980년대, 공연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난 신촌거리

1985년 3월 마포구 서교동에 세워진 ‘산울림 소극장’
 
1980년대 초반부터 신촌은 연극 전용 소극장들이 밀집돼있는 ‘연극거리’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공연법 개정안으로 소극장 문화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1981년 12월, 공연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소극장은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1986년 1월에 집계된 소극장은 총 24개로 이는 1980년 12월 말까지 11개의 소극장이 있었던 것에 비해 2배 증가한 수치였다. 새 공연법의 시행령으로 공연자 등록이 자유화돼 누구나 신고만 하면 공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백석 이하 또는 객석 면적당 3백 평방미터 이하인 공연장은 설치 허가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공연 각본 심사도 연극인들로 구성된 공연윤리위원회에 위탁됐다. 관람료 허가 제도가 삭제돼 관람료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게 됐다.

신촌 거리는 1980년대 초 연극을 보려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신촌 일대에 ‘우리 마당’, ‘말뚝이’, ‘애오개’, ‘신선’, ‘연우’등의 소극장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신촌소극장들은 1980년대 마당극이 본격적으로 연극화되면서 중점적으로 마당극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주변 대학가의 학생들 역시 마당극에 관심을 가지며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연우소극장 관계자 박정선(서울시 성북구·50세)씨는 “당시 마당극은 직접적, 간접적으로 시대 풍자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며 “그 때문인지 1970~1980년대 억압적인 정치, 사회 현실에 대한 발언 창구를 찾던 사람들에게 마당극이 매력적으로 비춰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신촌 일대에 세워졌던 소극장 중 주목할 만한 극장은 1985년 3월 마포구 서교동에 세워진 ‘산울림 소극장’이다.

산울림 소극장은 극단 산울림의 지도자 임영웅씨가 자신의 사재를 털어 만든 극단 전용극장이다. 15평 반원형무대에, 120석 규모의 소극장은 관객석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계단식으로 객석을 만들었다. 개관 기념 예술제에서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공연됐다. 산울림 극단은 이 공연으로 연극영화예술상과 한국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이 시대의 소극장들은 연극 공연 뿐 아니라 무용, 음악 등 공연예술 전반을 위해 사용됐다. 소극장 유지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당시 애오개, 벗 등의 소극장에서는 라이브 콘서트가 열려 젊은 층에게 호응을 얻었고 포크계열의 가수들이 상업성을 배제한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다.

산울림 소극장에도 무용단 공연이 자주 마련됐다. ‘전통무용의 밤’, ‘한일 춤의 원류를 찾아서’ 등 7회에 걸친 시리즈 무대가 만들어졌다. 개관 1주년 기념 축제에는 발레와 한국무용을 무대에 올리는 등 무용 소극장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개관 1주년 기념 ‘위기의 여자(보부아르 작, 오증자 역, 정복근 각색, 임영웅 연출)’는 본래 3월~4월 한 달짜리 공연이었지만 11월30일까지 공연 기간을 연장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임영웅 산울림 극단 대표는 “관극 후 마련한 관객과의 대화시간 덕분에 관객들과의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990년대 침체기 지나 2000년대 재부흥 꿈꾸는 신촌 소극장들
1990년대 들어 신촌의 공연문화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게 됐다. 신촌에 있던 민예, 예술극장 한마당, 연우 소극장 등이 혜화동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극단들이 혜화동으로 무대를 옮긴 데는 문예회관의 역할이 컸다. 1981년 4월 동승동에 대극장 709석, 소극장 200석의 현대식 시설을 갖춘 문예회관이 설립되자 일반인들의 발걸음이 서서히 대학로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신촌지역 극장가의 임대료도 상승하기 시작해 극단들은 비교적 임대료가 싸고 건물구조가 공연장에 적합한 대학로 쪽으로 대거 이동하게 됐다.

이후 신촌은 몇 십년간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년을 기점으로 신촌소극장 문화는 재부흥을 꿈꾸고 있다.

작년 신촌에 새로 들어선 ‘더 스테이지’와 ‘신촌 아트레온 시어터’, 본교 ‘삼성홀’ 등 3개의 소극장이 그 시발점이 됐다.

신촌 지역 소극장들은 현재 높은 예매율과 객석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작년 3월 신촌역 인근 빌딩 지하에 개관한 더 스테이지는 개관 이후 ‘쓰릴 미’, ‘마이 스케어리 걸’등의 작품을 내걸며 공연 기간 동안 평균 92%의 객석 점유율을 보였다.

본교 ECC 지하에 있는 삼성홀도 개관 작품 ‘그리스’에서 평균 예매율보다 10% 정도 높은 예매율을 보였다. 특히 그리스는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더 스테이지의 박용호 대표는 “이 시대 공연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소극장 공연을 중심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최대화하는 것”이라며 “관객과 배우의 소통을 통해 배우들의 성장을 유도하고, 관객들이 배우의 열정을 느끼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은진 기자 perfectoe1@ewhain.net
사진: 안은나 기자 insatiable@ewha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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