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 날, 미국에서 한국으로 교환교수로 오신 외삼촌 내외와 함께 학교 안에 있는 중국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디저트가 나올 즈음, 갑자기 외삼촌이 말씀하시길, “뭐야 이거. 여기가 여대여서 (남자인) 나한테 먼저 서빙하는거야, 그런거야?”

백발 할아버지의 귀여운 항의에 여기서는 주로 연장자에게 먼저 드린다고 설명을 드리고 순간 당황했던 종업원에게도 식당에서 여자가 우선인 미국에 너무 오래 사신 탓이라 해명을 했지만, 그 종업원도 나도 모두 한동안 깔깔대고 말았다. 나의 엄마 쪽 가족 유전자에는 아무래도 뭔가 독특한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외삼촌 덕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미국 시트콤 싸인펠드(Seinfeld)의 중국집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뉴욕에 사는 제리, 조지, 일레인 세 친구가 하루는 무척 배가 고픈 상태에서 예약 없이 중국집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자리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 중국인 주인은 자리가 난 것 같아도 그들보다 늦게 온 자기 친구한테 테이블을 먼저 내 주는 것이 아닌가! 분개한 세 친구는 항의도 하고 주인한테 뇌물성 팁도 주어보지만, 결국 포기하고 다른 음식점으로 향한다.

이 이야기가 -특별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아니었음에도- 내 뇌리에 아직도 남아있는 이유는 이러한 당연한 사회적 관행이 다음과 같은 철학적 비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가장 먼저 대접을 받아야 할까? 먼저 도착한 사람? 주인과 친한 사람? 아니면 배고픈 사람?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발전의 지점에 먼저 도달한 선진국이 만든 기준이 개발도상국에게는 무척 부당한 것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지난 봄과 같은 춘래불사춘의 기상이변과 관련된 아이러니 중 하나는 지구온난화의 책임이 더 큰 선진국은 미리 경험한 산업화로 인해 기술적 대처능력이 더 큰 반면, 그 책임이 덜한 개도국은 그렇지 못해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이러한 피해는 무역을 통해서도 발생한다. 자국 시민의 건강보호를 이유로 교역 상대국에 요구하는 유럽연합의 강도 높은 환경규제나 미국 환경청의 온실가스 규제노력은 모두 아직 환경친화적 제품을 생산할 기술을 가지지 못한 개도국에게 종종 위장된 무역장벽 정책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가 선진국이 양보해야만 하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환경규제 자체는 무척 중요한 과제이니까.

노동기준에 대한 규제로 들어가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개도국의 입장에서 노동규제도 환경문제와 마찬가지로 선진국의 위장된 보호주의로 여겨질 수 있다. 선진국들도 이전에는 현재의 개도국보다도 못한 노동기준을 가지고 선진국의 지위에 올라갔으면서 개도국에 이러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이 부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제적인 노동기준에 대한 규제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중국집 주인이 친구한테 베푼 친절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종 무척 배고픈 상태에서 음식점에 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 나한테 그런 친구가 생기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무척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스템 차원에서 작동하게 되면 지난 외환위기를 불러온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의 불명예를 씻기 어렵게 된다.

내가 혜택 받을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면 무척 좋은 일이 그로 인해 피해를 받게 되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적절한 사회적 관행에 순응하도록 오랫동안 훈련받은 내 머리와 몸은 당연히 선착자 우선의 원칙을 충실히 따르려 한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세상은 어려운 선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고민하느라 가끔 세상에 뒤처지는 느낌도 들지만, 그런데, 그런 내가 그렇지 않을 때의 나보다 조금 덜 싫은 것은 왜일까. 아무래도 유전자 문제라 생각된다.

“You know it’s not fair that people are seated First Come First Served, it should be based on who’s hungriest.” -Elaine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