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호텔에 도착했어요”라는 세계적인 작곡가 박영희 선생님의 상기된 목소리에 유난히도 잔인했던 4월도 저만치 흠칫 물러서는 듯싶다.

40년 넘게 독일에서 살았지만 언제든 김치전과 누룽지 밥을 나눠 먹으며 두런두런 함께 얘기할 수 있는 소박한 선생님은 몇 해 전부터 모국의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자주 오신다. 그는 물론 자신의 작품과 새로운 작곡기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수자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나누려 한다. 어린 시절 종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하며 작곡의 꿈을 꾸던 일,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절감했던 한계, 분단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진 정치적 혼란 속에서 겪은 숱한 방황,“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 선택한 타국의 삶에서 미치도록 그리워 했던 어머니와 고향…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가을 그가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받기 위해 방문했을 때 우리 대학에 들려 음악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했을 때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유학 생활을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오로지 연주 중심의 우리 음악 교육이었다고 얘기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음악사와 음악이론을 배웠고 동서양의 문학과 철학 책들을 섭렵하며 음악을 만들기에는 너무도 휑하니 비어 있던 자신의 정신세계를 채워나가야 했는지를 들으며, 한국에 돌아와 변화하지 않는 체제 안에서 고민하던 나는 유학 초기 힘들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선생님과 가슴으로 만날 수 있었다.

박영희 선생님이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서양의 현대음악을 대표하는 그의 작품 대부분에 한국어 제목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우물,”“비단실,”“항상,”“만남,”“타령,”“소리”등 그의 작품 제목들은 한국 여성의 경험 없이는 결코 쓸 수 없었음을 단언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한시와 현대시를 아우르며 도교, 불교, 기독교, 그리고 신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글들에서 영감을 찾아낸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그의 작품 “만남 [MAN-NAM]”은‘다름’을 전략으로 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음악언어를 만들어낸 곡으로 그녀를 단숨에 세계 음악무대 한복판에 올려놓았다. 이 작품에는 그의 모든 작품의 음악언어인‘어머니코드[Mutterakkord]’가 흐른다.

이 화음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의 경험을 들려준다. 또 다른 그의 음악언어는‘불일치화음 대위법[heterophonic counterpoint]’으로 서양의 화성의 논리로는 함께 하기 어려운 음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법인데, 마치 우리 붓글씨의 획을 악보로 그려 놓은 것과 같다.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의 그리움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표현한 이 작품은 1)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고 싶고, 2)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3) 꿈꾸지만, 4) 끝내 절제한다. 이 곡은 신사임당(1504-54)의 시‘사친[思親]’이 그 배경이다. 신사임당이 결혼 초기에 친정을 그리워하는 애달픈 마음을 담은 시가 박영희의 음악으로 거듭나며 두 여인의 절제된 마음이 시리도록 아프게 다가온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사뭇 작게만 느껴지는 한국적인 소재를 근거로 한 이런 작품이 어떻게 서구인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를 서구를 대표하는 현대음악가 중의 하나로 만들었을까?

아직도 한국국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 예술원의 회원으로 추대되었다.“만남[MAN-NAM]”의 외국어 표기가 앞과 뒤로 읽어 동일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만남이 사회문화적, 그리고 젠더의‘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기를 바라는 그의 마음이 제목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음악이라는‘상상의 소리 공간’을 통해 많은 이들을 서로 만나게 한다. 영국의 사회인류학자 존 블래킹(John Blacking)은 일찍이“만일 예술가가 의식적으로 민족적인 요소들을 작품에 표현하는 것보다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면, 더 국제적인 청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박영희 선생님은 이번 방문의 바쁜 일정을 쪼개 이화의 글로벌 온라인 강좌‘여성과 음악’에서 우리 학생들과 또 다른 ‘만남’을 도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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