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의 설립자인 스크랜튼(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선생님이 세상을 뜨신지 올해 100주년이 됐다. 스크랜튼이라는 이름은 스크랜튼 대학이 만들어지면서 매우 친숙해졌다. 그러나 정작 스크랜튼 선생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화인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에 이화역사관은 올해 특별전의 ‘이화의 설립자 스크랜튼을 만나다’로 정하여, 선생님의 숭고한 봉사정신과 업적을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갖게 됐다.

스크랜튼 선생님은 미국 감리교 해외 여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한국의 땅에 처음 인연을 맺으셨다. 이 선교회는 1869년에 조직돼 일본, 중국 등지에 여선교사를 파견하고 여성들을 위해 사업을 펼치던 기관이었다. 그곳에서 한국 여성의 선교를 위해 처음 파견한 분이 스크랜튼 선생님이었다.

스크랜튼 선생은 1885년 한국에 도착한 후, 여성들에게 참다운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보고 학교 설립을 준비했다. 1886년 문을 연 이 학교가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었다. 이화의 역사는 처음에는 어려운 난관이 많았다. 한국의 부모들이 낯선 서양여성이 운영하는 학교에 자신의 아이를 맡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학생 모집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스크랜튼 선생님은 굳은 의지로 어려움을 극복해, 고종으로부터 여학교로 인정 받아 이화라는 교명을 하사 받을 수 있었다.

이화가 차츰 자리를 잡게 되자 스크랜튼 선생님은 한국 여성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셨다. 1890년부터 1896년까지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일하는 한편, 서울전역으로 선교 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의 아들인 스크랜튼 의사와 함께 아현, 동대문, 상동 등지에 병원을 통한 선교를 활발히 진행하는 한편, 배움에 목말라 하는 여아들과 부녀자들을 위한 매일학교를 세웠다. 스크랜튼 선생님의 이러한 공이 인정받아 1899년에 주한감리교 여선교회 초대 회장에 피선됐으나 선생님은 언제나 일선에 나아가 봉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건강이 나빠지시면서 치료를 위해 두 차례나 미국에 가셨지만, 치료가 끝나면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77세가 되시던 1909년, 이땅에서 눈을 감으셨고 양화진 외국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셨다.
스크랜튼 선생님은 미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미지의 땅 한국에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마감하셨다. 오늘날 이화가 한국 최고의,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숭고한 밀알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되새기며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함동주 교수(이화역사관장)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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