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비비디바비디부’다. 모 통신사 광고에서 또 중독성 있는 CM을 내놓았는데, 신데렐라에 나오는 주문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어준다고 한다. 긍정적 마인드나 낙관주의의 힘은 여러모로 검증된 바 있으니 그 논란은 접어두고 하나 묻고 싶다. 생각대로 하면 된다고 주문을 걸어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15초의 달콤하고 짧은 광고 밖의 세상에서도 정말 ‘비비디바비디부’는 통할까? 긍정의 힘을 강조하고 현재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의지는 좋은데, 여기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생각대로 하면 이루어진다니, 그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각대로 하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 하나 겁낼 것 없는 청춘이라며 패기와 도전 정신을 강조하지만, 막상 보고 듣는 세계의 질서는 건강한 의지가 전혀 통하지 않을 듯 구부러져 있다. 획일화된 가치(오렌지? 어륀지!)와 개인의 욕망 역시 자꾸 엇나가기만 한다. 그 속에서 엄마 친구 딸이 아닌 우리는 필연적으로 갈팡질팡하게 된다(우리 엄마는 친구도 많은데 왜 나는 그 유명한 엄마 친구 딸이 될 수 없는가!).

외부에서 비롯되었든, 내부적인 문제든 우리가 겪는 당혹스러움과 슬픔은 소장의 융털만큼 많다. 릴케는『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인습의 도움을 빌려 모든 것을 쉬운 쪽으로만 해결해왔다며, 그러한 갈등을 배척하는 대신 침잠하여 집중하길 권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 모든 것을 밀어내려 한다. 빨리 이겨내고,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는 미덕에 대해서만 배워왔던 까닭이다. 자신이 겪는 열등감, 서로 다른 가치관에 대한 고뇌, 내재된 우울에서 발생하는 슬픔은 분명 고통스러운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위기에 봉착했을 때 스스로를 다독인다. 술도 마셔보고 친구들을 소집하기도 하고 소녀시대 빅뱅 원더걸스 기타 등등도 열심히 본다. 예쁜 사진이 곁들어진 싸이월드 풍의 잠언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들장미 소녀 캔디 부럽지 않게 두 주먹 꼭 쥐고 일어선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라고. 그런데 당신, 정말 괜찮은지?

릴케는 ‘슬픔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슬픔을 시끌벅적한 곳으로 들고 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위험스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슬픔은, 우리 안으로 무언가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충실하지 않으면 미지의 것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는 변화의 과정을 제대로 경험할 수 없고, 임시방편으로 치료했던 슬픔은 후에 더욱 더 무섭게 터져 나와 인생 전체를 흔들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므로 권유하는데, 스스로를 달래거나 애써 웃으며 일어서지 말고 과감하게 눈을 감자. 스스로가 부도덕하다거나 초라하다고 느낄 때일수록, 그 참담함이 자신의 존재를 뒤흔들 수 있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강조하지만, 비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언제까지 혼자 울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외부의 소리에 현혹되지 말고, 지금 자신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라는 뜻이다. 긍정적인 생각은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시 우리 나름대로의 내적 성숙을 이루어내고, 고유성을 갖추게 된 후에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부족한 글 때문에 전하고자 하는 말이 곡해될까 우려되어 릴케의 편지를 일부 첨부한다.

 “…… 왜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그 무엇이든 동요와 고통과 우울을 배척하려 하십니까? 이러한 상태들이 당신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시나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변화 과정 중에 있으며,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 당신의 모든 것이 변하기를 바랐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겪는 과정들 중에 병적인 것이 있다면, 병이라는 것은 유기체가 이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체를 해방시키는 수단임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유기체가 병에 걸리도록, 완전한 병을 갖도록 그리하여 그 병을 낑낑대며 충분히 앓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유기체로서는 이것이 발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진송(국문·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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