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러스 그리고러폴러스,


지난 해 12월 초 그리스 아테네시내 중심부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15세 소년이다. 그가 길에서 숨을 거둘 때, 나는 아테네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지중해의 따스한 햇살을 꿈꾸고 있었다. 물론 아테네대학 정치경제학대학원의 공식 초청으로 한국의 노사관계에 대해 발표하러 가는 처지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뮤지컬 맘마미아에서 본 찬란한 바닷가만 떠오를 뿐이었다.

하지만 공항에 마중 나오기로 했던 차편이 안 나오고, 시내로 들어갈수록 깨진 창문과 불탄 차들이 자주 보이면서 그동안 업 되었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간신히 도착한 호텔의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 나는 꿈꾸던 아크로폴리스 산책 대신 애꿎은 맥주만 축내며 CNN을 통해 마치 전쟁터 같은 아테네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목격했던 것은 역사적인 2008년 그리스 폭동의 현장이었다. 그 소년의 죽음은 30%에 이르는 최악의 청년실업률을 배경으로 진행된 대학민영화와 복지예산삭감, 그리고 부패스캔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촉발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특수 사립학교나 해외대학에 자신의 자녀를 보내는 그리스 엘리트집단이 청년실업과 저임금을 방치하는 동안, 형편없는 일자리에 좌절한 젊은이들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힐러리 클린턴,
올 2월 말, 한국을 방문하여 “거침없이 도전하라(Dare to compete)”는 연설로 이화여대생들을 사로잡았다. 세월은 1992년 남편의 대선 캠페인 때 “내가 집에서 차나 끓이고 쿠키나 구웠던 게 아니라구” 발끈했던 예비영부인을 노련하고 부드러운, 그러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여성 정치가로 바꾸어놓았다. 우리 학생들이 그녀의 유려한 연설에 감명 받아 그녀보다 더 훌륭하게 될 머잖은 미래를 꿈꾸던 나는 행사가 끝난 어수선 속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 날 보도된 공공기관의 대졸 초임 삭감정책에 대한 의견을 물은  모 방송국 시사프로그램 작가의 전화였다. 기업 내 이중임금구조나 세대 간 불평등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강력한 지침에 따라 정원의 제한을 받는 공공기관이 과연 깎은 임금으로 얼마나 안정적인 신규채용을 실시할 수 있겠는가? 그간 떠받들어 온 시장경쟁의 원칙은 어디로 실종했나? 공공부문의 정책은 곧바로 민간부문에 주요한 시그널로 작용한다. 아니나 다를까, 민간기업도 곧이어 초임삭감을 결의하였다. 결국 임금수준만 하락하고 청년층의 불안정 고용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구준표,
재벌 신화그룹의 상속남으로 올 봄까지 이어질 인기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메인 캐릭터이다. 대부분 판타지라 하지만, 나는 이 드라마의 초절정 리얼리즘에 가끔 깬다. 어쩌다 최고 엘리트집단의 자제만 들어가는 신화고에 들어온 구준표의 서민 여친 금잔디의 존재 자체에 분노하는 준표의 엄마이자 그룹총수 강회장은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의 배타성과 스크리닝 기제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불행히도,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이번에는 잘 작동하지 못했을 뿐이다.

만성적인 청년실업과 위태로운 사회통합의 문제는 진정한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 지 잘 보여준다. 대학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도전을 열망하는 다수의 우수인력을 배출하는 동시에, 그들이 제 값 받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할 책무도 함께 가진다. 그리고 그 책무는 학교 뿐 아니라, 이화인 여러분의 몫이기도 하다. 그 첫 걸음은 바로 소외된 이웃과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이 바로 나의 고통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사회와 소통하는 데, 불필요한 경계를 허무는 데 거침없이 도전하기를. 그렇다면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이화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대학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이주희 교수(사회학 전공) j.lee@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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