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현재

△1975년~1984년, ‘학도호국단’ 다시 활동, 초반엔 학내 활동 중심, 후반엔 정권 저항적 성격
 1975년 문교부 주도로 개최된 전국 98개 대학 총장회의에서 학도호국단 창설이 논의됐다.  그해 9월 전국중앙학도호국단이 발족했다. 우리 학교도 총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이 결성됐다. 이들은 학생의 손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학교에 의해 임명됐다. 학도호국단은 총무부?문예부?새마을부?지도부?종교부?체육부?훈련부로 나뉘어졌다. 호국단은 학교 축제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우리학교 창립 96주년 행사에서 소비성과 내용상의 저급성을 이유로 논란의 대상이 됐던 ‘배꽃잔치’와 ‘이쁜이잔치’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또 호국단은 대학 내 학회활동을 흡수했다. 이에 따라 각 학과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운영하던 학회지 발간?연구발표회가 중지됐다. 그러나 호국단은 하향적 행정처리?학생 간의 불신 등으로 학회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민주주의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이 강해졌다. 우리 학교 호국단도 대학 자율화를 외치며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호국단에 대한 독재정권의 탄압도 이어졌다. 1983년 5월30일 이대학보에 따르면 학내시위 때문에 축제가 연기되기도 했다.
 우리 학교 호국단장은 1984년 말 직접 호국단을 깨고 학생회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 3월 다시 총학생회가 재건됐다.

△민주화 투쟁 절정 이후 1980년대 후반 학생 운동의 분열, 민족해방 주장
 1986년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를 표방한 우리 학교 총학은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그들은 현 정권을 정당성 없는 ‘학살정권’이라고 부르고, ‘독재정권 퇴진’?‘파쇼 철폐’를 주장했다. 그해 대동제 때 영산줄다리기를 하면서도 타 대학생들과 함께 민주화투쟁을 위한 구호를 외쳤다. 1986년 총학생회장이었던 서영교씨는 “당시 총학은 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총학의 운동은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NL과 민중?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PD로 나뉘었다. 우리 학교 총학은 다수인 NL를 지지하면서도 PD운동도 동시에 진행했다. 1988년 5월2일 총학 내 학술부는 통일에 대한 대학생의 의식을 분석해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총학은 광주학살주범 미?청와대 독재처단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발족해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주장했다. 1988년 5월28일에 열렸던 대동제도 ‘노여움이 불붙는 오월이여! 살아오라, 민족의 가슴에 통일의 화살로’라는 주제로 열려 ‘통일 염원’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또 총학은 6?10남북학생회담에도 참가했다. 그해 열린 8?15 남북학생회담 때 당시 총학생회장 유송화씨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한편, 노동자 권리 투쟁도 동시에 진행했다. 1988년 3월 노동운동 탄압 분쇄 및 3?4월 임금 인상 투쟁지원을 위한 범이화 결의대회를 열었다.

△1990년대 총학생회,  등록금 투쟁 실시 등 현 총학의 모습 보이기 시작 1990년대는 혼란의 시대였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 달성되자 총학은 등록금 투쟁?학교 앞 상업 시설 반대 등 현재 총학의 초기 모습을 보였다. 1993년 총학은 학생?교수?직원?동창 모두가 참여하는 ‘범이화인주간’이라는 행사를 개최했다. 걷기대회?토론 등을 통해 학내문제에 대한 논의가 학교 안에서 공론화되는 시기였다. 당시 총학생회장 성윤숙씨는 인터뷰에서 “학생들 스스로가 학교의 문제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해 이화 발전의 실질적 주체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1994년 총학은 학교 예?결산안 공개를 요구하며 등록금 투쟁을 시작했다. 또 총학은 ‘공원부지 확보를 위한 탄원서 제출’ 등 학교 앞 상업화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총학도 사회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4년 4월 총학은 ‘민중생존권을 외면한 UR모르코협약안을 국회비준거부로 막아야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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