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화에서는 교정을 떠들썩하게 했던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문화관 로비에서 문화제를 진행하던 이화레즈비언 인권운동모임인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의 무지개 걸개가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CCTV를 통해 가해자들의 신분을 확인한 변날 측에서는 그들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자보를 학문관에 게재했다. 그러나 가해자들의 올바른 사과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도대체 납득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사건을 변명하기에만 급급했다. 사건은 가해자들의 가입동아리였던 ‘그레이트 비젼’과의 대화를 통한 합리적 해결을 모색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으나,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한 채 중앙동아리 제명이라는 씁쓸한 결과로 일단락 지었다. (왜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종결된 사건이 아니다. 어찌되었든 가해자들은 사과 하지 않았으며, 다음해에 또 다시 이런 테러가 자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좋았던 점은 사과를 요구하는 자보와 이를 반박하는 자보, 동조하는 자보들의 소통으로 학문관이 간만에 진짜 학생들의 공간 같았다는 것 정도다.

가해자들과 ‘그레이트 비젼’이 그들의 종교적 신념이라는 단호한 가치를 들어 폭력이 일어난 근본적 원인에 대한 반성이나 소통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며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니체가 간파했듯, 가치라는 단어는 고상해보이나 사실 처절함으로 점철된 말이다. 가치는 우리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준거가 되는 타당한 기준이기 전에, 생존 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강자의 규범이며 질서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다, 인권이다, 도덕이다, 혹은 신의 계율이다, 라는 지극히 절대적이고 원론적으로 보이는 가치 아래 국가와 종족의 말살이 이루어지고 타자에 대한 테러와 폭력이 정당화되는 일이 충격적이지만,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리라. 대화를 요구하는 변날과 이를 회피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가해자측의 모습을 지켜보며 “오늘날 우리가 맞서 싸우고 있는 위험, 그것은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공유된 가치의 부재다” 라는 아지자 베나니의 말이 떠올랐다. 가치라는 단어가 어느 한 쪽만의 전유물이 될 뿐, 공유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틀에서 밖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포지션에 대한 동일시가 너무도 확고하기에 자신의 상황만이 ‘다들 그러는’ 평균이며 현실이 된다. 그러나 자신이 모르니까 또는 자신의 영역이 아님으로 그 나머지 상황은 존재하지 않거나 부당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릴 수 있는 걸까.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김에, 한 가지 더 이야기 하겠다. 얼마 전 한 여성학 수업에서는 성판매 여성(이 관계 속에서 여성은 성을 매매하는 집단이 아니라 주로 팔거나 혹은 팔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성판매 여성이라 명명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을 초청하여 특강을 했다. 현재 성산업에 종사하는 성판매 여성들은 여성단체가 성판매 여성들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를 피해자로 동일화하여 구제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을 비판한다. 특강자는 성판매를 하는 여성들은 거의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성산업에 뛰어들며,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인 경우가 대다수이며, 어느 정도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 탈성판매 한다고 말한다. 감금이나 폭행을 당하며 빚에 쪼들리는 성판매 여성은 소수이며 이런 악행을 행하는 포주는 노동조합에서 영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제도 한다는 것이다. 2004년 9월 이후 성매매 방지법 시행 이후 범법자가 되어 공권력의 단속을 피해다니는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합법화 속에서 음성적 성산업을 축소시킬 수 있으며 성판매 여성들의 부당한 환경 개선과 인권 보호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직접 들려주는 성산업 현장과 성판매 여성들의 조건은 우리가 익히 매체로부터 보고 생각해왔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 특강은 이화 내에서 논쟁들을 불러일으켰다. 성판매 여성들이 주장하는 성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한 가정의 가장을 유혹하는 여성들이므로 성판매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견이 제기된 것이다. 여기서 성판매의 근절이냐 허용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안에는 일부일처의 가부장제, 여성의 섹슈얼리티, 성에 대한 이중규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경제적 계급문제, 여성에게 부당한 산업구조, 성판매라는 규정의 모호한 경계 등 다양한 논의지점들이 복잡하게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목소리를 ‘일반 여성’의 위치 안에서 이해하고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규정하려는 것은 타자를 인정하고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수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들과 다른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자신의 위치에서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마침내 보고 싶은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다양한 존재로 개방할 것인지. 변화하지 않는 진정한 나란 없다. 나와 타인이, 다르지만 그러나 즐겁게 살 수 있는 길은 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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