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우리 학교 중문과에 교환교수로 와서 2년 간 강의하다 돌아간 베이징대학 중문과의 모 교수는 한국에서의 생활경험을 다룬 수필집(『獨立韓秋』)을 중국에서 출판한 바 있다. 그 책에서 그는 한국과 중국을 비유하여 “중국은 용을 존중하고 한국은 호랑이를 숭상하니 한 쌍의 ‘용과 호랑이 이웃’이라 할 수 있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이 보고들은 것이 점차 많아지면 우월감이 상당히 강한 한국인들에 대해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한국인들이 가진 부적절한 우월감을 꼬집었다.

각기 용과 호랑이의 자존을 지켜주어야 함은 당연하지만, 상대방에 대해 함부로 우월감을 가지거나 표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우리는 전체로서의 중국을 정확히 알지 못하거나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서 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쉽게 말해 버리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최근 일간지에서는 중국의 혐한(嫌韓)·반한(反韓)의 감정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제때 치유하지 않으면 심각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인들의 혐한·반한의 감정은 이번 베이징올림픽대회를 계기로 뚜렷하게 표면화되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 축적되어 온 결과라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중국인들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다행히 올림픽대회 이후 재중 한국인들이 ‘겸손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기’, 즉 ‘겸따마다’운동을 펼치고 있다는데, 이것은 우리 스스로 되돌아볼 것이 많다는 점을 시사한다.

최근의 중국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데, 중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를 잘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중국의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의식이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중 간 인적·물적 교류가 사상 유래 없이 크게 증대되어 수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찾았다. 그런데 초기 한국인들이 자주 다녀온 지역은 백두산, 연변 등의 중국 북방지역이거나 관광지였는데, 그 때 형성된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부분의 중국을 보고 전체 중국의 모습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중국은 수교 이후 10여 년을 경과하는 사이 전혀 다른 새로운 중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10여 년 전의 미몽(迷夢)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지금의 중국을 정확히 알아 변화된 중국에 대한 올바른 상을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은 층위가 다른 두 사회가 궤도를 달리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는 일반대중사회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트사회이다. 한국인들이 쉽게 떠올리거나 접하는 중국사회는 아마 일반대중사회일 것이다.

일반대중사회도 중국사회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는 또 다른 층위의 엘리트사회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엘리트사회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중국을 이끌어 가는 핵심이다. 중국사회에 대한 심화된 이해를 위해서는 바로 이 엘리트사회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소장은 “중·한 교류는 수교 이후 16년 동안 표면적 교류에 머물렀다”며 “한국인과 중국인은 서로를 너무 모른다”고 말했다.(『중앙일보』2008.9.1) 물론 그는 “최근 중국 내 반한 정서는 표면층에서의 오해로 빚어진 일시적 문제”라며 “서로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히면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진(金) 소장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중국 또는 중국인을 바로 알아야 한다. 현대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은 그의 저명한 소설 「아Q정전」에서 중국인의 노예근성을 ‘아Q’라는 인물로 형상화한 바 있지만, 이젠 그런 ‘아Q’의 관점에서 중국을 바라보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니다. 좀더 신중하게 그들을 대면하고 표층을 넘어 그들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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