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현상문예 평론부문 당선

1. 마르트 로베르의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은 프로이드의 가족소설개념에 의거하여 문학의 인물을 업둥이형과 사생아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업둥이는 자신의 진짜 부모는 고귀한 신분으로 언젠가는 자신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꾸여 자기 암시한다. 또한 업둥이는 어린시절의 황금시기에 대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한 회귀욕망을 보이며, 어린아이가 되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이성에 대해서도 여성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비슷한, 성적인 모습이 배제된 영원한 여인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두는 모습을 보인다. 최근의 소설에서는 힘든 경제적 상황과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들이 다시 옛날의 부족함 없었던 황금의 어린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꾸거나 완벽히 자신을 보살펴주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어머니적 여성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이러한 업둥이의 모습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작가가 천운영으로, 천운영의 소설들 속의 많은 인물들은 대부분 이러한 업둥이의 모습을 띄고 나타난다. 그녀의 발은 전족을 한 것처럼 작고 위태롭다. 14문 버선을 벗기면 아기처럼 보드랍고 작은 발이 숨겨져 있다. 굳은 살 없는 뒤꿈치는 땅 한번 디뎌보지 않은 살처럼 동그랗고 야들야들 하다. 잘못해서 여기 있는 거야, 나는 지금. 하얀 늑대가, 하얀 늑대가 나를 거기로 데려다 줄 꺼야. 순록은 이제 어디로 가요? 늑대 여인이 데려가지. 늑대 여인이 뼈를 맞추고 숨을 불어넣으면 순록은 다시 제 무리에서 태어난단다. 우리도 죽으면 늑대 여인이 데려가요? 그럼 데려가고말고. 이러한 업둥이의 서사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구조와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역시 어머니를 추구하지만 강력한 남성인 아버지에 의해 결국 거세위협에 굴복하여 부모의 자식으로 되돌아가 성장하고 사회로 편입된다. 업둥이와는 달리 어머니로 상징되는 어린 시절을 추구하지만 어머니를 포기하고 사회적 법칙으로 이루어진 바깥 세계로 편입되는 것이다. 천운영이 2007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내가 데려다 줄께」는 이러한 업둥이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성격이 모두 드러나 그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인물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2. 주인공 사내는 대학교수로 여제자의 유혹에 넘어가 성관계를 갖지만 그 일이 학교에 알려지게 되면서 제자를 성폭행한 파렴치한 교수로 몰리게 된다. 결국 사내는 홀로 차를 타고 가던 중 늪에 짙게 깔린 안개를 보며 불현듯 자살을 결심하게 되고, 알몸으로 늪에 투신자살을 시도한 사내를 늪에 사는 가족이 구해주게 된다. 그 가족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계집애까지 여자들만 사는 집으로 사내는 자신을 살려준 계집애의 어머니에게서 위로와 안식을 찾는 한편 묘한 성적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던 중 사내는 할머니로부터 그 늪 주변에 살았다는 한 연인과 관련된 노래하는 탑의 이야기를 들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늪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서 사내가 묵고 있는 그 집의 여인들이 사실은 계집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갑자기 의심과 두려움이 들어 방속에 칩거하게 된다. 마침내 두려움에 떨던 사내는 계집애의 어머니가 아침에 집을 나서는 소리를 듣고 뒤를 밟아 여인을 강간하지만 사내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어머니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체험을 시켜준다. 사내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뱀의 허물을 들고 있는 계집아이의 손에 이끌려 노래하는 탑을 찾게 되고 그 속에 들어가서 사내는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다시 늪의 입구로 돌아온 사내는 자신이 자살을 시도했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차와 옷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차를 몰아 늪 속으로 돌진한다. 천운영의 「내가 데려다 줄께」는 사회에서 실패한 사내라는 인물이 늪 속으로 회귀하는 이야기이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은 ‘늪’속으로 들어간 사내가 여인가족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업둥이의 욕망과 이에 끊임없이 대립되고 갈등을 일으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욕망간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허물을 벗기 위해 준비하는 뱀’의 이야기는 사내의 상태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늪이 곧 계집아이의 어머니로 여성을 의미한다면 허물을 벗기 위해 며칠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 성난 채로 늪을 응시하다가 마침내 허물을 벗자마자 늪으로 돌진한다는 뱀의 이야기는 표출되기 직전 사내의 내적 갈등이 최고조로 다다른 것으로 어머니의 늪으로 가고 싶은 업둥이와 아직 육지에서 그 욕망을 억누르는 오이디푸스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 과정과 결국은 어머니인 늪으로 돌진하는 패배로 끝난다는 결론의 의미를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3. 사내가 처음 자살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안개였다. 사내는 운전을 하던 중 안개를 만나 낯선 길을 헤매던 중 안개의 중심인 거대한 습지로 오게 된다. 안개는 소설 속에서 늪의 동의어로 사내가 갈망하게 되는 어머니적인 존재이다. 사내는 안개속의 늪으로 들어갈수록 심리적인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모든 게 안개 때문이었다. 동으로 남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운전을 하는 동안 안개는 기습적인 테러를 감행하곤 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온 몸이 노곤하게 풀어지면서 편안함을 되찾았다. 어머니 품에 안긴 젖먹이 어린애처럼 아무 걱정도 들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스윽 슥, 치마 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내는 그 소리를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사내는 제 이름을 부르듯 휘익 휙 휘파람을 따라 불러 보았다. 그것은 먼 곳에서 온 반가운 기별, 젖먹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나지막한 호명소리, 오래 기다린 연인의 반가운 손짓이었다. 이러한 안정감과 어머니의 편안함은 여인이 등장함으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 사내가 왜 자살을 하려 했으며 어떻게 지금의 상황으로 이르게 되었는지는 여인과 아침에 늪에서 만난 후에 이어지는데 여인에 대해 순간적으로 성적인 욕망을 느끼지만 곧 그 욕망은 여 제자와의 성 추문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몰락한 사내의 회상으로 인해 억눌리게 되고, 그 회상을 통한 사내의 세상에 대한 평가는 ‘서운하다’이다. 사내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미국으로 건너간 후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해 온 아내와 분명 먼저 사내를 유혹하여 관계를 가지고 난 후에는 억지로 성폭행을 당한 것처럼 사내를 곤경에 빠뜨린 제자에게 돌리면서 자신을 정당화한다. 사내의 회상 속에서 사내는 권력이 없는 존재이고 매정한 사회에 의해 그동안의 힘과 자부심을 모조리 빼앗긴 더러운 알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내의 회상 속에서 그들은 사내보다 힘이 세고 이미 사내가 가진 힘과 지위와 권력의 마지막 하나까지도 모두 빼앗은 걸로 등장한다. 소설 첫머리의 ‘나의 죽음이 진실을 대신하리라’라는 사내의 유서도 이러한 사내의 억울한 마음을 대변한다.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폭력을 경험했다고 믿는 사내는 늪의 여인들 틈 속에서 계속 자리를 잡고 살기를 희망하게 된다. 계집애의 할머니에게서 잃어버린 동화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수하고 폭력으로부터 비껴 있었던 어린아이의 상태로 계속 고정되어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내의 이상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존재가 바로 ‘노래하는 탑’이다. 노래하는 탑은 계집애의 할머니가 예전에 늪에 살았던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것으로 공기의 공명을 통해 노래 소리가 나는 탑이다. 이 전설이 할머니의 입에서 마치 동화처럼 신비롭게 사내에게 전해진다는 점과 탑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인이 ‘학처럼 예쁜 처녀애’로 묘사되는데, 이 표현이 다시 계집애의 엄마를 묘사하는 표현으로 쓰인다는 점, 설화의 내용이 모든 생명체가 조화롭게 평화를 추구하는 업둥이의 황금시절 즉 어린 시절의 낙원을 의미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노래하는 탑은 사내의 업둥이 욕망의 궁극적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업둥이의 욕망은 사내가 이름 그대로 ‘사내’적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함으로 위기를 맞게 되고 갈등을 겪는데, 노래하는 탑의 이야기를 하던 노인이 뒷이야기를 하지 않고 일어서 갈대밭으로 가는 부분은 갈대밭에서 사내가 여인에 대해 다가가려다 망설임을 느끼고 후에 사내가 여인을 강간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앞으로 이어질 이러한 갈등을 암시하는 복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사내는 어느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원시의 숲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 들곤 했다. 그 속에서 사내는 나무와 대화하고 새들과 함께 날고 뱀과 함께 똬리를 트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것은 스스로의 경계를 허물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지는 안개 속 풍경과 같았다. 노파는 말을 멈추고 갈대밭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갈대밭 어딘가에 노래하는 탑이 있는 것처럼. 사내는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하지만 노파는 나무지팡이에 힘을 주고 일어나더니 지팡이를 앞세워 갈대밭길을 걸어갔다. 4. 여인과 함께 늪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려는 사내의 업둥이 욕망은 곧 위기를 맞이한다. 사내의 이러한 위기를 상징하는 존재는 ‘뱀’이다. 뱀은 사내가 자살시도 후 탱자나무 집에서 깨어나면서 계집애와 함께 계집애의 엄마를 만나러 가던 중 처음으로 등장하는 데, 새끼 뱀의 허물을 계집애에게 받으면서 사내는 뱀들이 허물을 벗기 위해서 늪을 찾을 때에는 몸속의 수분을 모두 말려야 허물이 잘 벗겨지므로 며칠동안 늪을 바라보며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다가 마침내 허물을 벗으면 바로 물속으로 돌진한다는, 그리고 허물을 벗기 전의 뱀들의 눈 색깔은 흐린 안개처럼 뿌옇게 흐려진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 ‘허물 벗는 뱀’에서 허물을 벗기 전은 이 욕망이 최대로 상승된 때로 허물을 벗기 전에는 질서에 위협당하고 순응하는 대학교수인 사내가 육지 즉 사회의 질서와 아버지의 땅에 몸을 붙인 오이디푸스로서 어머니인 늪을 응시하면서 갈등을 겪지만, 마침내는 땅에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어머니의 세계인 늪으로 뛰어들고 만다. 처음으로 여인의 집에서 깨어나 계집애와 뱀 그리고 계집애의 어머니와의 만남 이후 사내는 뱀과 점점 더 동일시된다. 사내는 눈에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끼면서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허물벗기 전의 뱀 눈이 이럴까. 눈이 씀벅씀벅했다. 그리고 목이 탔다. 사내는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이러한 뱀과 함께 나오는 단어가 입술이다. 입술은 여인의 신체 중에서 가장 사내를 자극하는 부분으로 소설에서 뱀이 허물을 벗을 때도 입술부터 허물을 벗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신체 부위로 입술은 얼굴을 세 부분으로 나눴을 때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한다. 또한 형태의 유사성으로 인해 여성의 성기와 성을 의미하는 부분으로 여겨져 왔다. 또한 입술은 어린이의 구순적 욕망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허물벗기는 입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늘로 덮인 얇은 입술. 뱀은 어미 옆쪽을 땅에 비벼 피부를 등 쪽으로 돌렸다. 사내는 그저 휘파람 소리를 따라 나온 것이라고 제 속에 대고 말했다. 안개를 따라 걷고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고무 장옷을 입고 걸어가는 여자의 모습만 아른거렸다. 두꺼운 고무 장옷 속에 숨겨진 가녀린 몸이, 발갛게 상기된 볼과 그보다 더 붉은 두 입술이. 5. 그러나 여인에게 머물고 어린아이 같은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사내를 막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처음 사내는 회상을 통해서 결국 자신이 세상에서 비루하게 쫓겨진 인물임을 재확인하며 그가 여인을 욕망하는 것이 여제자의 경우처럼 다시 그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다는 위협감에 사로잡힌다. 사내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자에게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내는 진창인지도 모르고 발을 디뎠다가 겨우 빠져나오고, 눈을 찌르는 갈댓잎을 헤치며 걸었다. 칼날처 럼 잘 벼린 갈댓잎이 슴벅, 얼굴을 스쳤다. 같은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아들이 어머니를 탐할 때, 이미 자란 성인이 다시 어린아이로 회귀하고자 할 때 사회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간 순서상으로 사내가 가장 처음 겪은 여성은 아내이다. 아내는 아이들의 유학을 위해 사내를 두고 미국으로 떠난 후,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한다. 그 후 다시 대학에서 만난 여 제자는 분명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사내와 관계를 하지만 그 결과 사내는 제자를 강제로 강간했다는 누명을 쓰고 대학에서 매장된다. 이 같은 과정의 공통점만을 추려서 생각해 보면 사내가 여성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다가갈 때마다 사회적으로 나쁜 결과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늪에서 만난 여인에게도 사내는 이 같은 경험들 때문에 섣불리 여인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나 사내가 이 같은 두려움을 누르고 다시 사회로 복귀하지 않고 늪에서 정착하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 우연히 마을의 다른 남자로부터 탱자나무집의 식구들이 사실은 계집애의 아버지를 몰래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뭔 일인지 몰라도, 나 같으면 거기 안 있겠수. 남자가 있을 곳이 아니지, 거기가. 왜,요? 그 집 그냥 딱 봐도 음기가 철철 넘치잖아. 그 개들은 또 어떻고. 송아지 한 마리는 거뜬히 잡아먹게 생겼잖아. 그 집서 살던 남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잖아. 허구헌 날 술 먹고 여편네 팼다지. 그래서 그 할망구랑 여자랑 작당을 해서 죽였다고. 새벽에 늪에다 시체를 갖다 버리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어. 토막토막 잘라서 개들한테 던져줬다던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어. 여우같은 여자들. 여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계집아이의 아버지는 ‘개’로 나타난다. 개는 여자들이 토막낸 남자의 시체를 먹었고 덩치는 크지만 여자들의 음기에 눌려서 작은 계집아이에게도 꼼짝하지 못하는 남자다. 저 개들이 무서운 거야, 아저씨는? 쟤네 다 바보들이야. 덩치만 커다래갖구 내가 올라타도 꼼짝 못하는걸. 한 번 볼래? 계집애는 자신이 한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려는 것처럼 신발 한 짝을 집어 개에게 던졌다. 신발은 마당 한가운데서 자고 있던 개 머리통을 맞추고 떨어졌다. 개는 눈만 살짝 치켜떴다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내는 앞서 부인과 제자처럼 여인들에게 다가간 대가로 자신도 그 집의 사내와 같은 운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결국 사내는 어느 새벽에 여인을 강간한다. 사내의 마음속에서 생겨났던 안정감과 친근감을 스스로 파괴하여 그 자신이 또다시 세상에서 버림받는 상황이 오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어린아이로서의 자기를 버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육지에 몸 붙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이때 사내는 허물을 벗기 직전의 뱀이다. 사내는 여자의 팔목을 비끄러쥐었다. 갈대숲으로 여자를 끌고 가는 사내의 손길은 거칠고 우악스러웠다. 갈대가 꺾이고 그 속에 숨은 새들도 숨을 죽였다. 두려운 만큼 여자를 제압하는 손길도 거칠어졌다. 사내는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다리를 짓이기며 제 몸을 쑤셔 넣었다. 사내는 형벌을 수행하는 집행관처럼 냉혹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욕정이 아니라 경고였다. 두려움을 갖게 만든 여자에게 하는 선전포고였다. 6. 그러나 이 시도는 오히려 거대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느끼게 되면서 다시 업둥이의 모습으로, 편안한 어머니의 세계 자궁 즉 늪 속에 안주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여인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계에 발붙여 보려는 사내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 갈등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여인의 세계 속에서 안주하도록 이끌어준다. 사내가 원해서 세상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라도 자기가 있을 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몸을 떼고 일어서려는 사내를 여자가 붙잡았다. 그러곤 천천히 여자 쪽으로 잡아당겼다. 사내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사내를 끌어안았다. 여자 품에 안긴 사내는 꼭 젖먹이 어린애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스르르 잠이 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사내가 계집아이의 손에 이끌려서 가는 곳은 바로 할머니가 이야기 해 주었던 노래하는 탑이다. 탑 속에서 사내는 ‘진실’을 발견한다. 사내는 다시 처음 옷을 모두 벗어놓고 자살을 시도한 자기 차가 있던 곳으로 가서 다시 한번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벗어놓고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완전히 허물을 벗은 완성된 뱀들을 기다린다. 마술이었다. 탑은 사내의 옅은 숨소리에도 반응하며 음악소리를 들려주었다.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 목덜미를 간질이는 현의 가느다란 선율, 더러운 두 손을 두들기는 낮은 피아노소리. 사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탑 안에는 포로록, 맑은 실로폰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사내가 찾은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 자기가 있을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그는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또 때로는 폭력적인 수단을 써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그 위치가 곧 사내가 세상에 살아있는 가치이자 이유였기 때문이다. 시련을 겪을 때마다 사내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사회에서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기 어려워서 라기 보다도 세상의 법칙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진실이란 바로 그 사실이다. 사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었던, 바로 사내가 세상에 있을 곳은 없고 세상에는 맞지 않는 존재라는 그 사실이었을 것이다. 여인이 자신의 세계로 이끌어주었기 때문에 사내는 세상에서 자기가 있던 비루한 위치를 담담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내가 이 세계에 몸 붙일 수 없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진실’에 담긴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사내는 더 이상 고통이 없고 자신이 초라해 지지도 않는 늪 속으로 들어간다. 이 소설의 제목 ‘내가 데려다 줄게’라는 것은 사내를 고통 없는 세계로 데려다 주겠다는 여인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그 세계는 여인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에는 제목이 ‘틈’이었는데,‘틈’은 여성의 성기를 암시하며 소설에서 사내가 다시 어머니 자궁 속으로, 고통을 초월한 피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사내는 양복 윗주머니에서 흰 종이를 꺼내 펴보았다. 내 죽음이 진실을 대신하리라.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밝힐 진실도 대신할 진실도 사내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진실은 모두 늪 안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진실을 구하고자 하는 자들은 늪으로 갈 일이다. 거기 늪의 짙은 안개 속에서 깊은 잠에 들어갈 일이다. 두툼한 낙엽 융단이 추위를 막아주는 그 따뜻한 늪이 데려다 줄 것이다. 안개를 피워 올려, 그곳으로. 7. 그렇다면 ‘내가 데려다 줄께’의 사내는 왜 결국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업둥이로 돌아가는 것일까?사내의 과정을 성장소설의 플롯으로 살펴본다면 결국 사내가 성장하여 무사히 다시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세계, 정지된 늪의 세계로 돌아갔으므로 이는 반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성장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결국 세계로 복귀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다시 세계의 악을 소화시키고 복귀하기에 그 악이 너무도 거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업둥이들은 비단 천운영의 소설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소위 IMF소설이라고 불리는 최근의 소설들의 특징은 비루한 아버지, 약한 남성의 서사라는 것이다. 또한 대체로 이전보다 개인적이고 거대 담론보다는 개인의 미시담론을 위주로 진행된다는 평을 받고 있다. 확실히 요즘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하고 투쟁하지 않으며 자신의 경제, 사회적 기반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따라야 할 도덕적인 가치들은 내가 먹고살고 내 위치를 다지는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로 그려진다. 성공을 위해 망설이지 않고 크리스털 꽃병을 내리쳐 살인을 하는 정이현 소설속의 악녀들이나 살아남는 문제 앞에서 정의를 포기하고 항복하는 김훈의 남한산성 등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인물들은 그만큼 예전에 비해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기 힘들어진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 단순히 천운영의 소설 한편으로 이 모든 것을 확실히 단정한다는 비약일 수 있겠지만 분명 「내가 데려다 줄께」의 사내는 다른 소설의 비루한 인물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 소설이 수록된 천운영의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추천하는 소설가 박민규의 글에서 ‘아무 일 없이 이 세계가 진행될수록, 아무렇지 않게 파괴되어갈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라는 말처럼 겉으로 보기에 현재 우리사회는 예전에 비해 아무 문제없는 상태인 것 같지만 사실 독재와 탄압이라는 눈에 보이는 공공의 적이 사라진 이후 오히려 더 강해진 세계의 악 때문에 칩거하거나 도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운영의 사내와 같이 어디에 있어도 불안하고 기를 쓰고 자기의 위치를 확보하려다 결국 패배하는 불쌍한 인물들은 더 자유로워지고 더 풍요로워진 사회에서 늘 불안에 떠는 불쌍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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