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현상문예 소설부문 가작

7. 보로메우스의 매듭 머리 속에서 모니터 화면이 펼쳐지며 폐기 처분되었던 파일들의 아이콘들이 나타난다. 나는 그만 두라고 소리치지만 인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호.exe 파일의 복구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수많은 파일들이 새로 만들어진 아나 디렉토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차례로 복구되기 시작한다. 인하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하지만 무언가에 붙박힌 듯 옴나위할 수조차 없다. 머리는 점차 사라진 기억들의 망령들로 채워진다. 소리지른다. 그러나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어느새 내 몸은 컴퓨터 모니터가 되어 있고, 인하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인하를 부른다. 그러나 인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스템 종료 명령을 내리려 한다. “안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면서 땀을 많이 흘린 모양이었다. 눈꺼풀 위에 햇빛을 머금고 있는 땀 한 방울이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감았다. 꿈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땀방울이 눈꺼풀 사이를 통과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어제는 토요일이었지만 회사에 일이 밀려 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겨우 일을 마치고 밤 10시쯤 집에 들어와 보니 캔 하나가 또 없어져 있었다. 컴퓨터를 확인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새로운 사진이 저장되도록 마련해 놓은 디렉토리는 말끔하게 비어 있었다. 사라진 캔은 최근에 수집한 커피소다 1052였다. 다들 비슷한 것 같지만 캔에는 저마다의 표정이 있었다. 어제 없어진 커피소다 1052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을 담고 있는 캔이었다. 다른 캔들처럼 화려한 외면과 무채색의 내면이 아닌, 안도 바깥도 온통 검은 색인 그 캔은 무표정하기에 가장 다양한 감정을 자아낼 줄 알았다. 나는 나의 표정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으므로 그 캔을 무척 아꼈다.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는 수집품 전부를 도둑맞는 것도 시간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자포자기적인 심정이 되어 혼자 소주를 마시다가 그제서야 식탁 위에 놓인 매듭을 발견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매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인하를 통해서였다. 그리고 인하는 벌써 이주 동안이나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매듭이 왜 내 식탁 위에 있을까. 샤워를 대충 마치고 나서 나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든 생각이 인하가 무호.exe를 실행시키는 악몽과 뒤섞여 실타래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맥락을 잡아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인하는 나에게 무호의 기억을 되새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인하의 사소한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가 모두 무호의 존재를 나에게 일깨우기 위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매듭 역시 인하의 그러한 간절한 노력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밤 치킨과 맥주를 사들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나를 방문한 인하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참 수다를 떨다가 할 말이 떨어졌는지 손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냅킨을 돌돌 말아 오랏줄처럼 엮어 동그란 링 두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링 두 개를 옆으로 치워놓은 후 줄 하나를 다시 만들었다. “오늘 집에서 아주 예쁜 걸 만들었어. 여기서도 만들어 볼까?” 나는 다리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며 고개만 끄덕였다. “자, 이 링 두 개를 이렇게 포개만 놓는 거야. 목걸이처럼 두 개를 통과시켜서는 안돼. 그러면 빠지지 않게 될 테니까.” 인하는 미리 만들어 두었던 링 두 개를 교집합 모양이 되게 걸쳐놓았다. “그런 다음에 마찬가지 요령으로 두 개 끼리는 절대로 엮이지 않게 이 줄을 통과시키는 거야. 편의상 오른쪽 링을 A라고 하고 왼쪽 링을 B라고 하자. 잘 봐. 그러면 A의 밑으로 집어넣었다가 B의 위로 통과시켜서, 자 여기서 엮이지 않아야 하니까 다시 A의 밑으로….” 인하는 A링의 밑으로 집어넣은 줄을 다시 B의 위로 통과시켜 링 두 개와 줄 하나를 서로 엮었다. 그런 다음 줄의 양쪽 끝을 이어 붙여 세 번째의 링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세 개의 교집합 모양으로 엮인 기묘한 모양의 매듭이 생겨났다. 인하는 그 매듭을 들어 내 눈앞에 흔들어댔다. 예쁘지? 하며 내 동의를 구하는 눈동자가 요란하게 빛났다. “이 매듭은 셋 중 어느 하나를 잘라내더라도 나머지 둘은 바로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셋이어야만 완벽한 거지 둘끼리는 아무 결속력이 없는 거지.” 인하의 말이 사실인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링을 하나씩 풀어보았다. 정말이었다. 어느 쪽 링을 풀어도 나머지 두 개는 자동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었다. “정말이네. 신기한데.” “신기? 신기하기만 해?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아?” “의미심장? 뭐가?” 매듭에 머물러 있던 눈을 거두어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빙긋이 웃었다가, 무표정하게 되었다가, 이번에는 우울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겁다 못해 비장해졌다. 그러나 눈빛만은 변함없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쳐다보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인하가 돌아가고 나서야 그녀의 진의를 알 것 같았다. 세 개의 링. 둘이서는 절대 서로의 삶을 통과하지 않지만 셋이 모이면 결코 풀리지 않는 매듭. 하지만 단 하나라도 제외되면 나머지 둘도 두수없이 분리되어 버리고 마는 관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어제 저녁 발견한 보로메우스의 매듭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정말 인하는 내 방을 침범한 것일까. 혹시 그때 만들었던 매듭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매듭을 내려놓고 시스템 점검을 시작했다. 프로그램에 이상이 있는지 먼저 확인한 다음, 몸소 범인이 되어 카메라의 성능을 시험해 보았다. 센서에 노출되지 않고도 문을 열 수 있는지, 거울 같은 것으로 센서를 교란시킬 수 있는지 등등. 그러나 결과는 명백했다. 현관을 기준으로 해서 복도의 모든 면이 사정권이었으므로 몸을 문 쪽으로 아무리 갖다 붙이거나 몸을 낮춘다 해도 촬영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만약 거울 같은 것으로 센서를 교란했다면 본인의 얼굴을 숨길 수는 있었겠지만 거울에 비친 영상은 파일이 되어 저장되어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현관이 아닌 다른 통로로 들어온 것은 아닐까. 그것 또한 어림없었다. 굳게 닫혀 있는데다가 밖에는 강철 보호대까지 달려 있는 베란다였다. 물론 들어올 수는 있겠지만 보호대가 떨어져 나가거나 유리가 깨져 있는 흔적쯤은 남게 마련이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보안시스템을 수정하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결함을 찾아낼 수 없었다.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인하가 돌아가고 나서 매듭을 치웠던가 아니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인하가 마지막 찾아왔던 날 인하가 했던 말과 행동 중에 단서가 될만한 것이 없는지, 그날 있었던 일을 꼼꼼히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인하가 마지막으로 찾아온 날에는 비가 왔었다. 우리가 무호 이야기를 한 것은 그 추적추적한 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우내 언 땅을 비집고 들어간 그 빗방울들이 땅 속 깊은 곳에서 음습한 기운을 몰아온 것 같았다. 촉촉하게 젖은 채 내 방안으로 들어온 인하의 코트에서는 옅은 흙 냄새가 났다. 인하는 그날도 예외 없이 과거의 무호에 대해서 두서없이 떠들었다. 언제나처럼 인하가 말하는 무호의 모습은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의 모습과 달랐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흥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날의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더라도, 내가 다시 무호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냉혈한이 아니었어. 그날 말야. 그날, 우리 셋이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장면을 목격한 날 말야. 그날, 무호는 술집에서 밤새도록 울었어. 진정으로 슬퍼했어.” 인하의 말은 내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인하의 눈에 물빛이 어리는 것을 보자, 나는 심장이 마비되는 듯한 물리적인 아픔을 느꼈다. 그날의 일이라면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고운 입자로 흩뿌리던 비, 땅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한 흙 비린내, 난데없는 고함, 그리고 단대 건물 옥상에서 갑자기 떨어져 내린 불덩이. 술잔을 붙잡고 있는 손이 떨렸다. 인하는 이제 무호를 그만 용서하라는 듯 애원하는 눈빛이었지만, 인하의 생각처럼 내가 무호를 다시 보게 되는 일 따위는 생기지 않을 거였다. 내 생각은 달랐다. 무호는 울지 않았다. 무호는 우는 척 했을 뿐이고, 무호를 사랑하고 있었던 인하는 그 눈물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인하는 속은 것이었다.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그 사건을 목격했지만 각기 다르게 반응했다. 나는 그 일에 깊은 환멸을 느껴 운동에 회의를 품게 되었고, 인하는 그 일을 계기로 그간의 고민을 벗어 던지고 적극적인 실천으로 나섰다. 하지만 무호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조차 녀석의 눈빛은 그저 무심할 뿐이었고, 이후에도 녀석은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아무런 가책도 회의도 엿볼 수 없었다. 녀석이 그날 인하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렸다면 그건 분명 연극이었다. 녀석에 대한 증오가 고스란히 인하에게 퍼부어졌다. 내 목소리는 매몰차게 흘러나왔다. 인하의 환상을 깨어부수어야 한다는 당위성마저 실린 목소리였다. 다 지난 일을 가지고 필요 이상으로 흥분할 필요까지는 없었을텐데. 조금만 신중하게 대처했더라도 인하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없었을텐데. 하지만 그때는 미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인하에게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과거가 바뀌진 않아. 설사 녀석이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도 했을 거라고 여기는 거야? 무호는 극히 현실적인 쾌락주의자였어. 녀석이 진정으로 슬퍼했대도 그건 연민 이상이 아냐. 설마 그 눈물 몇 방울을 가지고 무호에게서 투철한 사회의식 같은 걸 기대한 건 아니겠지?” 인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호는 단순하지 않았어. 모든 윤리와 상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진정한 저항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모든 언어가 이미 인간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지 않고서는 어떤 저항도 지배를 재생산한다고 믿었을 뿐이야. 무호는 의식이 아닌 몸으로의 저항을 꿈꾸었어. 정당하지는 못했지만, 무호는 그래도 나름대로의 철학은 가지고 있었던 거야.” “몸으로부터의 저항? 그래서 널 사귀면서도 매일 밤 다른 여자를 끌어들였구나? 그러니까, 진정한 혁명은 모든 사람이 짐승이 되는 일이란 말이지? 정신차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어. 과거를 포장한다고 해서, 네 상처가 덮어지는 건 아니야.” 실수했구나, 라고 생각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인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과의 말을 미처 마련하기도 전에 인하는 차가운 얼굴로 돌아섰다. “넌 변했어. 옛날엔 그렇지 않았는데. 하긴 넌 옛날의 네가 어땠는지 궁금하지도 않겠지. 지금의 넌, 옛날 사진 따윈 절대로 들여다보지 않을 인간이니까. 하지만 언젠간 너만의 과거가 항상 옳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해 주겠어.”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방을 나간 인하는 그 뒤로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인하의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컴퓨터의 파일을 열어 그날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방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과 잔뜩 긴장한 나무등걸처럼 휘어져 방을 떠나는 뒷모습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처럼 컴퓨터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인하는 깊은 상처를 입었던 모양이었다. 바바리 코트를 입고 사라지는 인하의 뒷모습에 단단한 껍질 같은 게 느껴졌다.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인하가 그리워졌다. 나는 어느새 예전에 만들어놓았던 아마존 디렉토리를 열었다. 수십 개의 파일들이 처음 저장되었을 때와 다름없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하나 하나 열어 보았다. 인하의 무표정한 옆모습이 조금씩 변화하는 옷차림과 함께 모니터 위에 등장했다가 스러졌다. 인하를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런데 곧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 사진들이 전부 63개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상황선의 파일 개수를 나타내는 란에 69개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세히 보기를 선택하여 파일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디렉토리 안에 섞여 있는 파일 중 여섯 개는 아마존 폴더를 만들고 난 후에 첨가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일들이 저장된 일자는 캔이 사라진 날짜와 정확히 일치했다.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잠시 동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곧 모든 것이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인하가 어떻게 보안시스템을 뚫고 캔을 집어갈 수 있었는지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사진이 찍히지 않거나 삭제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위치이동을 했을 뿐이었다. 인하는 자신의 사진이 찍히게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새로 찍힌 사진’ 폴더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아마존’ 폴더로 옮겨 놓기만 했던 것이다. 파일삭제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지만 이동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화면보호기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사진이 찍힌 후 오분 내로 마우스를 손에 잡을 수 있었다면 화면보호기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우스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타이머가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뒤로 일분 이상 컴퓨터에서 손을 떼지만 않았다면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얼마든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하가 옳았다. 난 옛날사진 따위는 절대로 들여다보지 않을 인간이었다. 아마존 디렉토리에 있는 사진들만 해도 그냥 지워버리기 아쉬워 고스란히 저장을 해 놓고도 다시 열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게 여러 차례 시스템 점검을 하면서도 아마존 디렉토리의 내용물이 첨가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따윈 품어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아니, 아예 아마존 디렉토리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게 정답이었다. 나는 최근의 날짜로 저장된 여섯 개의 파일을 열어보았다. 드디어 도둑을 잡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안도감과 그래도 설마 인하가 그랬을까 하는, 마지막까지 인하에 대한 믿음을 붙잡고 싶은 안타까움이 줄다리기를 했다. 그러나 사진을 열어본 결과는 안도감의 승리였다. 동시에 처절한 배반감이었다. 여섯 개의 사진 속에는 기다란 철사줄 같은 것으로 문을 따고 있는 인하의 모습이 선명하게 촬영되어 있었다. 보안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한번이라도 옛날 파일들을 점검하는 수고를 했더라면 무호의 유령이 내 방을 덮치는 환상에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을 거였다. 결국 인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내 심리의 허점을 이용한 셈이었다. 시스템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더군다나 캔을 훔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인하가 했던 것처럼 나도 그녀의 박물관에 침입해 캔을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모든 것을 알고 나자, 공포가 찾아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무언가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내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것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서,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 속으로 나를 몰아넣을 것만 같았다. 지금 내 방에선 캔이 아닌 다른 것들이 없어지고 있는 중은 아닌지, 내가 매일 사용하는 컴퓨터 속엔 아마존 디렉토리 외에도 다른 잊혀진 디렉토리들이 있어서 그 속에 포함된 파일들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제멋대로 이합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인하 외에도 수많은 잊혀져간 사람들이 있어서, 자신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도 나를 찾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들이 몸 속의 빈 공간들을 자꾸만 메워, 점차 숨도 쉴 수 없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두려움은 그러나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그녀의 자취방, 무호의 유품들 사이사이에 놓여 있을 캔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을 가로막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도 귀에 밟혔다. 무슨 뜻인지 진의를 파악할 수 없는 말. 그 말에 대해 품을 수밖에 없었던 물음표가 그대로 미끼가 되어 나를 그녀의 박물관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매듭을 떨어뜨린 것이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캔을 훔쳐내는데 성공했다면 매듭을 흘리는 실수 따위를 저지를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그녀가 흔적을 남긴 것은 나를 초대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인하를 찾아가서 그 캔들을 빼앗아와야 했다. 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리워서도 아니었다. 무호의 물건들 사이에 내 분신들을 놓아둘 수는 없었다. 더구나 나는 내가 수집한 캔들로만 그녀에게 남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무 때나 회상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인하가 범인인 것을 확인한지 삼 일째 되던 날, 나는 결국 인하의 방에 잠입했다. 커다란 자물쇠 하나가 채워져 있었지만 망치와 장도리로 쉽게 빼낼 수 있었다. 어떻게 캔을 가져올까 며칠씩 고민을 한 것이 무색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 나는 민첩하게 행동했다. 캔만 찾아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떠나리라. 방은 지난번에 보았을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다만 지난번처럼 무호의 물건들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책상 바로 옆에는 책꽂이가 있었고 한켠엔 화장대가 있었다. 왼편에는 철제 프레임으로 된 옷걸이가 두 개 나란히 세워져 있었으며 오른편에는 낮은 책상 위에 구형 컴퓨터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컴퓨터 옆에는 줄톱, 니퍼, 갖가지 종류의 조각칼과 순간접착제, 조그마한 전기톱과 소형 용접기 같은 도구들이 올려져 있었다. 아직도 인하는 금속공예나 조각 같은 것을 하는 것일까. 어쨌든 여자 혼자 사는 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캔은 쉽게 눈에 뜨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보았다. 샤워를 한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주위를 끌만한 물건은 없었다. 부엌으로 나가보았다. 찬장을 여기저기 들들 뒤져보았지만 빈 소주병만 나뒹굴 뿐이었다. 책상 안에도 옷걸이 뒤편에도 내가 찾는 것은 없었다. 화장대를 의심해 보았지만 처음부터 캔이 아홉 개씩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였다. 내 눈은 자연스럽게 연장들이 놓여 있는 앉은뱅이 책상 쪽으로 옮아갔다. 얼마 전 예쁜 물건을 만들었다며 유난히 말이 많았던 인하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너지듯 꿇어앉아 책상 위에 깔려 있던 천 조각을 걷었다. 책상 밑에 제법 크기가 큰 플라스틱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를 열었다. 작은 사진첩 하나와 낡은 노트가 있고 그 위에 기괴한 모습을 한 물건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처음 상자를 열었을 때 그것은 무슨 고철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길쭉한 철판이, 내가 알지 못하는 규칙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은 미확인 비행물체의 가상모형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물건을 아주 오래 전부터 보아온 것 같다는, 그래서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것은 그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었으리라는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캔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캔이 아니었다. 그것은 훔쳐낸 캔을 잘라내고 이어 붙여서 재조립해놓은, 세 개의 뫼비우스 띠로 이루어진 보로메우스의 매듭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그녀의 손에 왜 상처들이 끊이지 않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내가 캔을 되찾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궁싯거리는 동안 그녀는 나의 사랑하는 캔들을 전기톱으로 자르고 망치로 구부리고 용접하고 있었던 것일까. 부모는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아이는 벌써 유괴범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 다음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된 후의 심정이 나와 비슷할 것 같았다. 캔을 찾아냈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인하에게 물어보아야만 했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8. 캔.exe 인하는 무호의 일기장에 라이터를 갖다대었다. 겉 표지의 끄트머리에 옮겨 붙은 불벌레는 점차 몸피를 늘려 뱀처럼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노트 전체가 불의 위장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인하는 그 촉수 같이 뻗어 나오는 불의 입 속으로 무호의 물건을 하나 둘 던져 넣기 시작했다. 무호의 유품을 덥석덥석 받아 삼키며 불덩이는 사람 몸집만큼 커졌다. 몸에 와 부딪치는 음험한 온기가 느껴졌다. 불 때문에 발갛게 물든 인하의 얼굴표정은 그러나 돌처럼 차가웠다. 인하가 그토록 차분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 울분을 터뜨리게 했다. “왜 그랬어. 왜 나를, 너의 과거 속으로 끌어들였어. 왜 몰라도 될 일을 알게 만들었어.” 분노로 떨리는 내 목소리와 달리 인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누구한테 얘기해야만, 이걸 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어차피 누구한테 얘기해야 한다면, 너한테 할 수밖에 없잖아?” 인하가 무호의 마지막 유품을 불 속에 던져 넣자 바람이 불었다. 불덩이가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인하의 몸도 그 움직임을 쫓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인하는 여전히 냉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호는 나한테 모든 윤리관을 버리라고 말했었지. 난 바보처럼, 그 얘기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어. 수많은 저술과 이론을 끌어들이는 무호의 논리는 그만큼 치밀한 것이었어. 무호는 결국 날 설득하는데 성공했지. 자신은 상관하지 않을 테니, 좋은 남자가 있으면 얼마든지 파트너로 삼으라고 하더니, 거의 매일 내 방에 다른 여자를 끌고 들어왔어. 아니면 야릇한 암컷의 냄새를 온몸에 덕지덕지 쳐 바르고 새벽녘에야 돌아왔지. 죽여버리고 싶었어. 벼랑에서 떨어졌단 소식 들었을 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런데 육 년이나 무호는 내 머리 속에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이젠….”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나냔 말야.” 소리질렀다. 인하는 나를 차갑게 쳐다보았다. 네가 그걸 모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움찔하여 뒤로 물러섰다. 인하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처음부터 너희들이 만들어낸 바보 같은 신화였잖아? 그러니까 너네가 치워 없애. 무호에 대한 기억 따윈 이제 네가 가져가. 난 집으로 돌아갈 거야. 난 이제 이 방을 나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갈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인하는 발작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타오르는 불길도 인하처럼 온몸을 뒤흔들며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인하는 옥상바닥에 떨어져 있는 라이터를 주웠다. 담배를 피우려는구나 싶었는데, 갑자기 키들키들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총을 쏘듯, 탁 탁 탁, 자꾸만 라이터를 겨는 것이었다. 날아가, 날아가. 키키키키. 울대가 울컥 솟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햇빛 속에 부유하는 먼지들처럼 선연하지만 붙잡을 수 없는 기억들이 불 무덤 주위를 맴돌았다. 어지러웠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돌아서야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가까스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철 계단을 내려오다 두 번이나 발을 헛디뎠다. 결국에는 굴러 떨어졌다. 그래도 인하의 웃음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뛰었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자꾸만 달음질쳤다. 한참을 그렇게 뛰다보니 모르는 골목이었다. 9년 동안이나 내 생활의 터전을 이루었던 학교 앞 거리에 모르는 골목이 있었다니. 처음 보는 건물입구에 주저앉았다.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느껴졌다. 머리 속에 결코 풀 수 없는 매듭 하나가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왜 몰랐을까. 무호의 죽음에 탐탁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만 생각했을 뿐, 자동차 사고조차 말짱 연극이었을 줄은 몰랐다. 이단에 맞물려 있었던 변속기. 떨어져 나간 문짝. 사라진 시체. 바람이 불었다. 인하의 웃음소리가 다시 귓전을 때리는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이 허청거렸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대학생들의 무리가 어깨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 무리를 쫓아 갈림길이 있는 곳까지 발을 옮겼다. 세 개의 갈림길. 도대체 여기는 어디일까.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방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멈추어 섰다. 어디선가 인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호는 자동차 사고로 죽은 게 아냐. 가장 넓은 길을 택해 발을 내딛었다. 어차피 모르는 길이라면 넓은 길을 걸어야만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의 속도가 빨라졌다. 다리가 떨리는 것이 살을 에이는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심장에서부터 전해지는 전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담벼락에 머리를 기대었다. 몸 속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무호의 일기장을 집어던진 것과 인하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인하는 내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심상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노트를 주워서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내밀었다. 자동차 사고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녀석에 대한 혐오가 뱃속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한번에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기를 다 읽고 났을 때, 녀석에 대한 분노는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인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국어책을 읽듯 감정이 없는 말투였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에도 미칠 것처럼 괴로워해야 했던 것은 인하가 아니라 나였다. 직접 보지는 않아도, 인하 앞에 다시 나타난 녀석의 모습이 어땠을지 눈에 선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심상한 얼굴로, 담배 한 대를 멋들어지게 피워 물었겠지.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온통 주술 같은 이야기들을 주워섬겼을 것이다. 녀석은 자신의 마지막 연극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기뻤을 것이다. 제임스 딘처럼 멋지게 죽어서,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어쨌든 녀석은 차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기 전에 2단 기어를 넣어 차 속도를 충분히 줄인 다음,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열린 차문은 차가 가드레일과 부딪치는 순간 떨어져 나갔다. 차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며 녀석은 절벽 앞에 한동안 서 있었으며, 때맞춰 뛰어내리지 못했더라면…하는 생각에 뒤늦은 공포를 느꼈다. 그때까지의 일은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술을 먹고 비에 젖은 해변도로를 달렸고 차가 미끄러지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무호는 차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순간 뛰어내렸다. 그쯤에서, 녀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살아남은 것에 만족했어야 했다. 그런데 녀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마치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프로그램을 짜듯이, 자신이 죽었을 경우에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해, 경우의 수를 타진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것이 상상으로 그치기만 했대도 상황은 극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골목어귀에 세워져 있던 어느 술집 간판에 옆구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생소한 술집의 이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 가짜일까. 정말 녀석의 일기장에 적혀 있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연극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연출된 자신의 모습에 현혹되어 자신이 예측하고 계산하는 대로 움직여 줄 거라고 믿은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속은 건 사람들이 아니라 녀석이었다. 연극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 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연극이 아니다. 바람을 타고 나를 뒤쫓아 온 것일까. 바로 옆에 인하가 있기라도 하듯, 선명한 목소리가 귀속을 파고들었다. 무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어느 날, 무호가 나를 찾아왔어.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갈 데가 있다면서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끌더군. 나를 데려간 곳은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별장이었는데, 나를 앉혀 놓고 술만 마시더니, 그랬어. 자기는 이제 정말 죽을 생각인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없었어. 정말 죽을 생각이었다면 왜 내가 그걸 보아야만 하지? 왜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다. 녀석은 인하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든지 죽을 용기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언하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죽을 용기. 우리가 그토록 떠들었고 그것 때문에 고통받았던 그 말을, 통째로 뒤집어엎고 싶었겠지. 인하는 말을 계속했다. 술에 잔뜩 취해서는 이제 시간이 되었다고 하더니 별장 앞 숲으로 나를 데리고 갔어. 자기 몸에 기름을…기름을 들이붓더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골목을 통과했지만 다시 좁은 삼거리가 나타났다. 여전히 모르는 길이었다. 오른쪽을 택했다. 완만한 고갯길이었다. 갖가지 모양의 단독주택이 줄지어 있었다. 다시 내리막길. 단독주택의 행렬이 계속되었지만, 원룸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니었다. 머리 속에서 인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한테 라이터를 던져주면서 불…을 붙이라고 했어. 그때에서야 난 알았지. 내가 뻔히 못 붙일 걸 계산하고 하는 짓이라는 걸. 내가 울며불며 말리면 그만이란 걸. 그리고 내가 사람들에게, 내가 본대로 전달해주기만 하면 무호가 나에게 돌아오리란 걸. 그게 자신의 존재이유를 확인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란 것도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난 그때…, 결심했어. 이번만은 무호의 시나리오대로 하지 않겠다고. 무호도 각본대로 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싶었어. 세상은…, 결코 연극무대가 아니라는 걸.” 바람의 사나운 손떠귀가 점차 등을 사납게 후려치고 지나갔다. 머리 속에 인하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다시 세 개의 갈림길 앞에 서 있었다.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길이 큰길로 나가는 길일까. 어느 길이 진짜고 어느 길이 가짜일까. 멈추어 섰다. 이번에는 선뜻 가야할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온통 뒤범벅이 되어 정말 그런 일들이 있었는지조차 판가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호는 죽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다른 모든 것이 변경될 수 있다 해도 그 사실만은 바뀔 수 없었다. 그 사실 하나를 붙잡고서라도 일어서야 했다. 하지만 어지럼증이 돌아 다시 주질러앉고 말았다. “정말로 불을 붙일 생각은 없었어. 그냥 겁만 주려고 그랬던 거야. 살려달라고 한 마디만 하면 용서해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몸을 떨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그때, 불이…, 불이…, 날아서, 나비처럼, 갑자기. 내가 그런 게 아냐. 무호가, 자석처럼…, 마치 자석처럼 불꽃을 빨아들였어. 내가, 내가 그런 게 아냐.”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날벌레들이 눈앞을 뒤덮는 것 같아 손을 내저었지만 시야는 고장난 텔레비전 화면처럼 부옇게 흐려지기만 했다. 어두운 골목의 저편, 단독주택지구가 끝나고 밝은 술집골목이 펼쳐지는 어귀에 신기루가 솟아났다. 나는 어느새, 물처럼, 공기처럼, 그 투명한 신기루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부유하는 빛의 가벼움 속에서 나에게로 다가오는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에 마우스를 움켜잡고 있는 손이 보였다. 무언가에 긁히고 뜯긴 상처로 뒤덮여 있는, 피투성이 손이었다. 그 손은 무언가를 한참 망설이더니 무호 아이콘을 열었다. 무호.exe가 실행되었고 곧 무호의 얼굴이 나타났다.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그러나 무호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호.exe는 녀석의 일기장에 쓰여져 있던 내용을 그대로 반복했다. “난 어둠이었고, 넌 빛이었어. 넌 시대의 희망, 난 처단되어야할 어둠. 난 네가 부러웠어. 넌 완벽했어. 너의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너는 파출부 일을 하며 너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어머니에게 보답해야 할, 한 가정의 미래를 걸머진 장남이었지. 너는 절망을 말할 자격이 있었고, 희망을 말할 권리가 있었지. 하지만 난….” 모니터 속에서 ?.exe의 반박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논리를 뒤집어도 과거가 달라지진 않아. 넌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누가 뭐래도 난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넌 졸부자식이었어. 넌 너 자신밖에 모르는 현실주의자였어. 난 다 알고 있었어. 너의 모든 행동이 연극에 불과했단 걸. 진실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포즈에 불과했단 걸.” 무호.exe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 넌 정말 멋들어진 연극을 했어.” “연극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너야.” ?. exe는 흥분해서 외쳤다. 무호.exe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난 다 알고 있었어. 너의 모든 행동이 연극에 불과했다는 걸. 너의 아버지가 막노동꾼이 아니라 공사판 현장감독이었다는 걸. 두 칸 방에서 산 것도 고액의 돈을 횡령했다가 회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었잖아? 넌 참 교묘하게도 내가 과시하면 할수록 너의 집안사정을 더 낮추었지. 마치 빛이 밝아질수록 그늘이 짙어지는 것처럼 말야. 그렇게 해서 넌 다시 빛이 되었지. 너의 외면은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너의 내면은 빛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고 있었지. 그럴수록 나의 내면은 어둠 속에 잠겼지. 그래서 너는 빛, 나는 어둠…. ?.exe가 소리질렀다. “그런 궤변이 어딨어. 그건 날조야.” 그때 메신저가 아마존.exe의 방문을 알려왔다. 나는 거부했지만 이미 아마존.exe는 방안으로 들어온 후였다. 아마존.exe는 인하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우습지 않아? 너와 결별하고 나서 무호는 눈에 띄게 망가져 갔지만 넌 그렇지 않았어. 무호가 너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어서 파멸했다면, 넌 이미 네 속에 무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 무호가 필요 없었던 거 아냐? 너야말로 육년 전의 무호랑 똑같아. 세상 모든 것을 비웃으면서 너 자신만을 사랑하는.” ?.exe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그만둬. 난 힘들게 살았어. 그래도 난 내 젊음의 한때를 바쳤어. 적어도 난내 작은 상처를 정당화시키려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비웃진 않았어. 그따위 말장난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런다고 지금의 내 삶이 달라지진 않아. 절대로. 이제 제발 그만둬. 다 집어치워.” 아마존.exe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머리 속의 인하 음성은 오히려 더 커질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해? 그럼 지금의 너를 한번 되돌아 봐. 언제부터 네가 그렇게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다녔지? 전산과에 다닌 건 무호였는데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된 건 왜 너지? 넌 옛날 사진 따윈 들여다보지도 않는구나. 하지만 네가 모르는 사이에 너의 과거와 현재는 변하고 있어. ” 모니터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칼날 같은 목소리가 등뒤에서부터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슨 대단한 저항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무슨 대단한 변절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웃기지 마. 너야말로 현실주의자였어. 넌 한번도 네 신념에 이의를 제기해 본적이 없었잖아?” 갈림길을 등지고 도망치듯 걷기 시작했다. 컴퓨터 모니터는 점점 작아져 하나의 점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무호와 인하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어처구니 없는 일들, 너무 우스워 끔직한 일들. 갑자기 과거가 잘 짜여진 컴퓨터 시나리오처럼 여겨졌다. 정해진 이야기가 없는, 상황에 따라 어떻게든 변할 수 있는 시나리오. 나는 이제 우리들이 벌렸던 게임에 캔.exe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고 나니 정말 우리는 ‘캔’이라는 시나리오 속에서, 인하가 만든 보로메우스의 매듭처럼, 벗어날 수 없는 궤도를 맴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시나리오는 상황의 옮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단지 모든 상황을 똑같은 체계의 2진수로 조합해낼 뿐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가능한 확률만을 계산한다. 일단 프로그램 안에 들어서면 게임을 어떻게 진행시키건 도달하게 되는 상황은 프로그램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캔.exe는 끝났다. 난 영원히 캔.exe를 종료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길은 어두웠지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만에야 미로 같은 골목을 벗어났다. 큰길이었다. 그 길이 지하철역에서 원룸 쪽으로 향하는,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퇴근길임을 알아차리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역 쪽으로 얼마쯤 거슬러 올라가고서야 내가 걷고 있는 곳이 매일 지나다니는 익숙한 거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카메라는 내 얼굴을 세 번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나는 붉은 색 플라스틱 박스를 벗겨내고 그 속에서 거리센서와 카메라를 끄집어내었다. 그것들은 내 발 밑에서 완전히 부서졌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카메라 렌즈가 어둠 속에서 잠깐 빛을 발했다. 렌즈를 가져다가 망치로 사정없이 내려쳤다. 부서진 렌즈는 더 이상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컴퓨터의 지난 파일들을 열어 하루에 세 개씩 찍힌 내 얼굴을 찾아보았다. 한번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던 내 얼굴. 인하의 말이 옳았다. 코트 깃을 귀밑까지 바짝 치켜올리고 조소를 머금고 있는 사진 속 인물은 인하의 방에 걸려 있던 무호의 대형사진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하지만 그것은 인하의 얼굴이기도, 오래 전에 사라진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나는 열어놓았던 파일의 창을 모두 닫고 하드 포맷 명령을 넣었다. 이제 내 컴퓨터 속에 있는 모든 자료와 시스템 파일이 깨끗하게 삭제될 것이었다. 다음으로 나는 캔꽂이에 꽂혀 있던 캔들을 쓰러뜨려 바닥에 쏟고 하나씩 하나씩 그것들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 한가운데 앉아 똑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엉성한 동작에 손에는 수많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피가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뜯겨진 캔들은 마치 제가 흘린 것처럼 붉은 핏방울을 매단 채 바닥 위에 널브러졌다. 마지막 남은 캔을 해체했을 땐 인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덕분에 아홉 개의 캔에 피를 더 묻혀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몇 시쯤 되었을까. 캔들의 시체와 함께 기진맥진했던 나는 날이 밝았음을 깨달았다. 침대 옆 창문으로 성가신 햇살이 자꾸만 비쳐들었다. 커텐을 치려다가 말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안에는 무호가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눈에는 거미줄 같은 핏줄이 얽혀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녀석은 피투성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넌 빛이었고, 난 어둠이었어.” 녀석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녀석의 깨어진 얼굴에 피가 흘렀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녀석의 얼굴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먹을 휘둘렀다. 유리조각이 마디마다 파고 들어가 주먹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 웃었다. 바닥으로 흩어져 버린 유리조각 속에서 녀석은 더 이상 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이제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다. 이제는 캔이 아니라, 거울 뒤로 숨어버린 나 자신의 안과 밖을 해체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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