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현상문예 소설부문 가작

4. 빛과 어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캔들은 더 이상 도둑맞지 않고 안전하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컴퓨터를 확인해 보니 63개의 새로운 그림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 꼴 보기 싫은 남녀가 매일 같이 내 원룸 앞을 전희장소로 이용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결함을 일으켜서 아무도 없는 복도를 촬영한 것은 아닐까. 궁금증을 느끼며 첫 번째 그림파일을 열어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든가든하게 차려입은 한 여자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긴 머리채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처음에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마에서 내려오는 부드러운 곡선과 조각 같은 코가 이루는 미묘한 부조화가 아마존의 것임을 곧 알아챌 수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그림파일을 차례차례 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 자세 그대로였다. 그 다음날도, 다음 다음날도. 다만 옷차림만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급해진 나는 브로우즈 명령으로 60개 남짓의 사진을 한꺼번에 열었다. 수십 개로 분할된 프레임 속에서 옷만 바꿔 입은 아마존들이 거의 똑같은 앵글과 틸트, 포즈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것은 상업용 필름의 컨셉트 사진모음을 방불케 했다. 가장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해 우연적인 결과까지 고려하여 수없이 반복해서 찍은 사진들. 어느 것이 진짜 아마존일까. 일단 아마존이란 폴더를 만든 다음 그 사진들을 저장해놓았다. 왠지 다른 사진들처럼 그냥 지워버릴 수 없었다. 다음으로 한 일은 시스템 점검이었다. 후레쉬가 연속해서 터졌을 텐데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는 게 이상해서였다. 그러나 시스템에는 이상이 없었다. 후레쉬는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아마존은 어떻게 한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보다, 언제, 어떻게 내 집을 알아낸 것일까. 왜 매일 같이 내 집 앞에 나타나 저렇게 음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일까. 머리 속에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물음표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녀의 출현이 내 머리 속에 떠올린 수많은 물음표들을 폐기시켰다. 그녀의 삶에 대해 더 이상 아무 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보안 시스템도 수정했다. 디지털 카메라와 적외선 센서를 방 안 입구로 옮기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경우에만 연속해서 3장의 사진을 찍도록 프로그래밍했다. 그리고 후레쉬를 발견 못할 경우를 대비해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나도록 조그마한 스피커를 장착했다. 만약 후레쉬에 영향받지 않는다면 소리에 놀라 고개를 쳐들게 될 것이고 범인은 정체를 드러내게 될 거였다. 그리고 더 이상은 방 밖에서 벌어지는 쓸데없는 풍경에 당혹할 일도, 그녀의 사진에 마음이 흔들릴 일도 없을 터였다. 그녀가 내 방 앞에 찾아온 시간은 거의가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였고 내 퇴근시간은 8시였다. 이변이 없는 한 그녀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보안 시스템은 이제 완벽했다. 그러나 내 심리상태는 시스템만큼 완벽하지 않았다. 원룸과 1시간 거리는 족히 떨어져 있는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2시와 3시 사이에는 이유 없이 불안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퇴근하고 나서도 그녀가 내 집 앞에 서 있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들떴다. 그녀와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려야 했다. 그녀는 보이지 않게 되자 훨씬 더 자주 내 마음속에 나타났다. 어디에나 그녀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집안으로 옮겨진 카메라 렌즈는 밖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그녀의 영상을 찍어 나르는 듯 했다. 컴퓨터 모니터 속에도, 퇴근길 지하철 안에도, 원룸으로 올라가는 복도와 내 집안 벽 속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어김없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녀석의 체취가 내 몸에 뿌려진 향수처럼 붙어 다녔다. 부산에서 돌아온 뒤의 며칠을 그녀의 눈동자와 녀석의 체취 속에서 보냈다. 내용물을 잃어버린 비닐봉지처럼 길거리를 아무렇게나 휩쓸려 다녔다. 집에 들어갈 용기가 서지 않았다. 종로나 신촌, 대학로를 방향 없이 걸어다니다가도 그녀나 녀석을 닮은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자주 움칫거렸다. 녀석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되짚어보면, 녀석의 죽음에는 확실히 의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과속으로 인한 추락사라지만, 바다에서 건져낸 무호의 자동차 기어는 2단에 맞물려 있었다. 경찰은 속도를 줄이기 위해 엔진 브레이크를 사용한 것으로 결론지었지만, 그래도 의혹은 남았다. 또 차에는 운전석 쪽 문짝이 달려 있지 않았는데, 그 문짝이 물 속이 아니라 절벽 중턱쯤에 걸려 있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점은 무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급류에 휩쓸려 대륙붕을 넘어갔을 거라는 구조대원의 추측이 만약 틀렸다면? 그렇다면 무호는 지금 어디 있는가. 혹시 어디에선가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내 도리머리를 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다니. 그녀의 갑작스런 출현이 현실감각을 마비시킨 모양이었다. 더구나 녀석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의 우월을 확인해야만 살 수 있는 놈이었다. 은둔생활 따위는 녀석과 어울리지 않았다. 주말이 되었다. 그날은 퇴물취급을 받던 왕고참 모가지가 드디어 잘린 날이었다. 우리 팀의 성원들은 별다른 목적의식도 없이 술을 마셨고, 12시가 넘어가기도 전에 모두들 취했다.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소줏집에서 시작한 술자리는 맥주집을 거쳐 단란주점으로 이어졌다. 나는 양주 서비스로 나온 8.15 콜라 캔을 코트 깊숙이 넣어두고, 컴퓨터 프로그램과 전자오락을 혼동하는 깡통 같은 여자애와 유영석의 ?네모의 꿈?을 불렀다. (……)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티브이,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아루들. (……) 주윌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사람의 멋진 이말, 세상은 어쩌면 네모의 꿈일지 모올라아. 짝짝짝짝. 다음날 나는 오후 2시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과한 대낮의 투명한 햇살이 집요하게 망막 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커튼을 쳤다. 어둠이 깔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한동안 누워 어둠에 적응한 후 몸을 일으켰다. 머리 중앙에 괴어 있던 두통이 오른쪽 관자놀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예리한 통증 속에서도 절실한 갈증이 느껴졌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침대를 빠져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희뿌연 형광등 불빛에 망막이 저렸다. 그 빛과 함께 잊은 줄만 알았던 오래 전 기억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하얀 아침이었다. 대구에 내려가 있던 나에게 무호가 찾아왔다. 누렇게 타버린 연탄들을 담 앞에 내놓으려고 주인집 대문을 열고 나가자 롱코트 차림의 녀석이 우뚝 서 있었다. 녀석의 등뒤에 서 있는 스포츠카가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녀석의 차가 우리 집 전세 값보다 훨씬 비쌀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내 어깨는 비굴해졌다. 반면 반갑다며 손을 내민 녀석의 모습은 당당했다. 나는 녀석의 눈을 통해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무호는 연탄이 묻어 거뭇해진 내 얼굴을 보고 있다. 내 어깨 뒤로 다섯 식구가 살고 있는 두 칸 방 애옥살림이 거침없이 드러난다. 다세대 주택의 반 지하, 어둡고 누덕누덕한 방 두 칸을 조금이라도 가로막으려고 나는 몸피를 늘려본다. 그러나 무호에게는 다 보인다. 거친 목재를 건목쳐 얼기설기 벽과 천장을 올린 옥외의 부엌 한 구석엔 밀린 설거지감이 고무 대야에 아무렇게나 담겨 있고, 그 옆 수도 아래에선 중학교에 다니는 내 동생이 찬물로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다. 손빨래가 주렁주렁한 빨래줄 바로 아래 아침으로 먹을 김치찌개가 끓고, 군데군데 곰팡이 핀 방안엔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그 모든 것이 드리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빨 사이에 담배를 물고 밖을 내다본 막일꾼 아버지는 무호를 곁눈질로 훑어보다가 말없이 방문을 닫아 버린다. 그 소리에 내 마음속의 문도 단단하게 닫혀 버렸다. 집안으로 몸을 돌리며 나는 말했다. “여기엔 너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뿐이야. 내가, 오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 돌아가 당장.” “난 널 보러 온 거야.” “내 초라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 왔겠지.” “나랑 화해하기 싫다고 그렇게 자기비하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내가 알고 있는 너는 이렇게 약한 인간이 아닌데?” “네가 알고 있는 내가 어떤 모습인데? 내 진짜 모습이 뭔지 얘기해줄까? 난 민달팽이야 진짜 달팽이가 되고 싶어하는. 달팽이는 적어도 집 하나는 건지고 태어났으니까. 내가 요즘 뭘 하는지도 가르쳐줄까? ?달팽이의 꿈?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어. 그 꿈을 네가 조금이라도 이해할는지 모르겠구나.” “빈곤에 대한 서푼짜리 연민으로 독자들을 계몽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어.” “연민? 너 같이 가진 놈들은 그렇게 말하겠지. 하지만 이게 나한텐 현실이야. 리얼리즘 그 자체, 감상이 끼고 들어갈 틈이 없는 사실 그 자체야. 돌아가 당장.” 녀석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배우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양키 같은 자식. 미국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는 놈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화해를 하러 왔다면 녀석은 좀더 겸손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내 자존심을 들큰거려서는 안되었다. 녀석은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멋들어지게 피워 물고는 말했다. “그래, 난 돌아갈 거야. 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녀석이 차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검은 구두를 신은 날씬한 다리가 차 밖으로 나왔다. 들고 있던 연탄을 놓칠 뻔했다. 인하였다. 그녀는 짧은 체크무늬 스커트에 허리가 잘록한 와인 색 롱코트를 입고, 빨간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인하가 성장한 모습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녀석은 빛이었고, 나는 어둠이었다. 녀석의 등뒤에서 인하는 잘 길들여진 꽃다발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내 등뒤에는 어린 동생과 두 칸 짜리 애옥살림이 연탄재를 뒤집어쓰고 짐승처럼 엎드려 있었다. 녀석과 화해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다. 다만 도망가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일 학년, 소주 냄새와 신나 냄새로 머리 속까지 휘발해 버릴 것 같았던 학회실의 어느 날 아침, 선잠을 털고 일어나 창문 앞에 선 나는 낯선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녀석을 보았다. 여자의 젖은 머리털과 녀석의 바뀌지 않은 옷차림은, 내가 에탄올과 메탄올로 몸의 안과 밖을 점령당하는 동안, 녀석이 간밤 내내 점령한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그 뒤에도, 새벽녘이나 이른 아침, 고만고만한 여자와 팔짱을 끼고 학교 안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녀석의 모습은 여러 번 꼬리를 밟혔다. 녀석은 항상 무심한 얼굴이었고, 같이 걸어가고 있는 여자는 매번 처음 보는 인상이었다. 녀석이 우연을 빙자하여 내 삶을 모독한 건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교문투쟁을 앞두고 살벌한 긴장감이 감도는 학교 앞 사거리를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쏜살같은 속도로 빠져나가는가 하면, 인하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나를 끌어다가 사창가에 집어넣기도 했다. 인하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다른 여자로 위로되거나 생물학적 욕구로 해소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녀석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녀석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건 아랑곳하지 않았고,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법 또한 없었다. 녀석의 독서습관 또한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녀석이 니체나 샤르트르의 책 따위를 펼쳐놓고 도서관에서 혼자만의 투쟁을 감행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호는 항상 열람실의 창 쪽에 앉아 하얀 햇빛을 받으며 수많은 사상서의 숲을 헤집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이 읽고 있는 책의 목록에는 일관성이 없었다. 녀석의 자리에는 “존재와 무?”와 함께 일본 만화책이, 고리끼의 소설과 프랑스 패션잡지가 나란히 올려놓아져 있곤 했다. 녀석의 의식 속에는 도대체 어떤 회로가 들어 있었을까. 녀석의 뒤통수를 노려보면, 녀석의 정수리를 갈라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죽창처럼 치밀어 오르곤 했다. 나는 녀석에게서 그 책들을 빼앗고 싶었다. 녀석의 행위는 그 책들에 대한 모독이었다. 녀석에게는 독서조차도 파괴적인 현학취미거나 자기합리화를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녀석을 용서했다.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녀석을 감쌌다. 내가 녀석을 용서한 건 녀석의 뛰어난 글 솜씨 때문이었다. 녀석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요소들을 하나의 작품 속에서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재능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녀석의 사소한 잘못 따윈 눈감아줄 수 있었다. 그런데 녀석은 내가 믿어왔던 신념들을 의도적으로 조롱하고 무너뜨리고 짓밟았다. 내 첫사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호와 인하가 대구로 찾아오기 한 달쯤 전,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온 나는 소주 두 병을 사들고 학교 앞 아마존의 자취방을 찾았다. 이층집 옥상의 옥외 창고를 개조해 만든 아마존의 자취방은, 그 동네 꼭대기에 저 혼자 횡덩그렁하게 놓여 있어 산꼭대기에 축조한 병참기지처럼 을씨년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 방 주위를 맴돌던 분위기는 좀 묘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야릇한 냄새가 술 취한 코끝으로도 진하게 맡아졌다. 직감적으로 무호가 와 있음을 알았다. 아마존이 무호와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돌 때였지만 무호의 아니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나였다. 만약 무호의 말이 거짓이었다면?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더구나 안에서는 여자의 것임에 분명한 신음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남자구두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구야? 하는 무호의 목소리가 들린 것과 내가 방문을 잡아챈 것은 거의 동시였다. 무호 위에 수직으로 앉아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그 바람에 역시 수직으로 서 있던 녀석의 물건이 이불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그것은 지시물을 잃은 화살표처럼 무심해 보였다. 녀석은 몸을 가릴 생각도 않은 채 단 한 마디로 나의 윤리감각을 흔들었다. ─아마존은 집에 없어. 문을 닫고 나오는 등뒤로 여자애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속에 있던 무엇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발걸음도 흐트러져 문 앞에 쌓여 있던 냄비들을 건드리고 말았다. 피사이 사탑처럼 모로 기운 채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냄비들은 내 발이 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놀랍게도 아마존은 밖에 있었다. 아마도 안에서 나는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 때와 다를 바 없이 낡은 트렌치 코트를 걸치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풀이 죽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하자, 그제야 내 손에 들린 소주를 발견했는지, 한 잔 할래? 하며 앞장을 섰다. 무언가 할 말이 많은 사람처럼 입술을 움찔거리던 그녀가 막상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헤비메탈이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맥주집이었다. 우리는 별 말 없이 술만 마셨다. 특히 그녀는 말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한참만에 무호랑 같이 사니? 하고 묻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자주 쳐다보았다. 자꾸만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그냥 다무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들썩거렸다. 죽여버리고 싶어. 죽여버릴 거야. 그날, 생전 처음으로 아마존이 우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존은 없었다. 인하라는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무호의 화려한 사생활 축에도 끼지 못하는 가련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손에 쥐어져 있었던 캔이 바로 하이네켄이었다. 푸른색과 초록색이 뒤섞여 딱 뭐라고 집어 말할 수 없는 그 빛깔. 나는 항상 그 색감이 아마존을 닮았다고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라져버린 그 색깔을 기억하기 위해 그 캔을 잠바 주머니 속에 챙겼다. 그 캔의 이름은 이제 하이네켄이 아니라 사라진 아마존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내 첫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한달 뒤 무호와 함께 찾아온 인하가 보았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변해버렸음을 실감했다. 인하의 옷차림 하나 하나, 몸짓 하나 하나, 미세한 화장선 조차도 무호를 떠올리지 않고는 마주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무호는 빛이었고, 인하는 그 빛의 움직임을 쫓아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고 있는 이름 없는 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를 가로막으려 하는 어둠. 처음부터 둘 사이에 내가 끼여들 틈 같은 것은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왜 2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을까. 나는 인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인하는 무호를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무호가 자신의 자취방에서 다른 여자를 안거나 말거나, 인하에게 그것이 무호와 헤어지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나는 그 하얀 아침, 기꺼이 무호의 그림자가 되어 나를 찾아온 인하의 웃음 속에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무호의 그림자. 그 단어가 떠오르자 나는 현재의 나로 되돌아왔다. 갑자기 도둑맞은 하이네켄이 떠올랐고 새삼스런 분노가 치밀었다. 정말 무호의 유령이 나타나 하이네켄을 가져간 것이라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 녀석을 처단할 것이다. 내 삶을 하나하나 조롱한 것으로도 모자라, 내 삶의 기념비들까지 빼앗아가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물 대신 맥주 하나를 집어들었다. 힘껏 쥐어보았다. 아무래도 그녀가 나를 찾아오기 전에 내가 그녀를 먼저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녀는 무호의 그림자일 것이므로. 5. ?.exe 보안 시스템을 바깥으로 옮겼다. 후레쉬와 스피커는 제거했다. 이번 시스템은 범인보다는 그녀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치 그녀를 찾아내겠다는 내 결심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 밤 그림파일을 점검해 보았지만 그녀의 사진은 더 이상 추가되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졌던 자취촌 앞에서 매일 밤 그녀를 기다렸다. 골목어귀에서 몇 시간씩 추위에 떨며 생각했다. 이제 스물 아홉. 그녀는 결혼했을까. 결혼하지 않았다면, 안락한 가정을 나와 그녀는 이 싸구려 자취촌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는 것일까. 머리 속에 물음표를 수십 개씩 매달고 자정이 넘을 때까지 서 있어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그녀와 다른 여자를 착각한 건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녀는 잠시 이 동네를 들렀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집안에 쳐 박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녀를 만나겠다는 결심은 흔들렸다. 하긴, 이런 식으로 어긋난 게 처음은 아니었다. 무호, 인하, 나, 이렇게 셋은 마치 같은 일을 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처럼 서로의 삶을 피해 다녔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운동권에 뛰어들었을 때, 무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으며 철저하게 본능적으로 살고자 했다. 그래서 나는 ‘민족’을 줄인 ‘?’으로, 무호는 ‘아나키스트’를 줄인 ‘아나’로 명명되었다. 인하는 술자리에서만큼은 여전사처럼 행동해서 ‘아마존’이라는 애칭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주위를 맴돌며 고민하는 축이었다. 아마존의 경력은 일 학년 때만 해도 벽화보수나 민중화 제작 같은 문예활동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이 학년이 되자 인하가 공예과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총 여학생회장으로 나섰고,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화두를 짊어지고 탈퇴를 선언했다. 다시 일년, 소설을 쓰겠다는 내 결심이 흔들릴 때쯤 동구권이 그 혁명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마존이 운동을 포기하고 무호의 애인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육 개월 뒤였다. 그런데 그때쯤 무호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거나 조직을 떠난 마당에 갑자기 운동을 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다. 특히 내가 느낀 감정은 분노 이상이었다. 나는 무호의 행동이 대세에 거스르는 일에 혈안이 된, 돈 많고 할 일 없는 놈의 악취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순전히 재미로, 녀석은 완벽한 연기솜씨를 자랑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농락하고 있었다. 물론 선배들은 무호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소문이었다. 가뜩이나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무호 같은 인물을 받아들인다는 건 조직의 결속력을 위협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선배들과 동기들의 녀석에 대한 악감정이 뿌리깊었다. 물론 녀석은 자신의 청이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것까지 계산했을 것이다. 교차하지도 만나지도 않는 세 개의 급격한 파동선. 우리의 관계는 그것이었다. 3년 내내 같은 동아리에 몸담고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한번도 같은 배를 탄 적이 없었다. 문학 동아리를 빌미로 슬그머니 사용하게 된 ‘우리’라는 호칭도 좀 우스운 데가 있었다. 언제 우리가 같은 세계관을 가져 봤으며, 의견을 일치시키거나 하나의 견해로 수렴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던가. 우리는 과도 달랐다. 나는 국문과였고, 무호는 전산과였으며, 인하는 공예과였다. 전공 탓이었는지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동아리 출석률이 저조했다. 그래도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억지로 꿰어 맞춘 것이나 다름없는 실낱같은 유대감으로 2년 남짓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니면서도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내가 80년대를 살았다면 무호는 90년대의 한복판을 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인하는 그 사이, 어느 쪽으로도 뛰어들 수 없는 애매한 경계지점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을 엇갈리기만 했던 세 명의 특이한 인연 탓으로 돌렸다. 우리가 하나의 선으로 합쳐지지 못하고 진폭을 달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법칙이 있을 법했다. 하지만 그녀의 옆얼굴과 조우하게 된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우연이었다. 그녀와 엇갈린 것이 필연이라면,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고, 나와 그녀는 서로 운명이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결론짓고, 재빨리 포기했다. 나는 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원룸 촌의 반짝이는 창문을 향해 돌멩이를 던져 넣고 싶은 충동마저도 고스란히 삼켜 버리는 나의 고귀한 일상으로. 퇴근해서 방문을 열쇠로 열고 있으면 카메라 렌즈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렌즈는 매일 세 장씩 내 얼굴사진을 찍었다. 이제 컴퓨터에 찍히는 것은 나 자신의 모습뿐이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다행한 일이었다. 그렇게 몇 주가 단조롭게 흘러가고 찾아온 어느 토요일 저녁,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썽을 피우는 프로그램과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모니터 오른편 하단에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는 그녀의 사진이 나타났다. 즉시 작업 중이던 프로그램을 닫고, 카메라 상태를 촬영모드에서 감시모드로 전환했다. 옅은 붉은 색 화면 속에 드러난 그녀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프레임을 화면 전체로 확장하고 줌을 사용하여 그녀의 모습을 가깝게 잡아당겼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 있을 뿐 초인종을 누르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가슴 졸이며 화면을 주시했지만 정말 그녀는 그림 같기만 했다.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라 정지된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처럼, 긴 속눈썹이 닫혔다 열리는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아예 망부석이었다. 바람이 불었던가.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코트자락이 큰 동선을 그리며 너풀거렸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이 소주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오래 전 내가 소주 두 병을 사들고 자취방을 찾아갔을 때의 모습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닥닥 문을 열고 뛰쳐나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마존, 하고. 그러나 그녀는 온데 간데 없었다. 길 밖에까지 나가 보았으나 어스름이 내리고 있을 뿐, 골목 위에는 사람 한 명, 바람 한 점 없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냄새만이 그녀가 지나갔을 길 위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을 절실히 기다리다가 막상 만나게 되면 예전에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무덤덤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수가 많다. 자신이 기다린 것이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이미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이 자아낼 수 있는 포즈들이었음을 차갑게 인식할 때 애초의 그리움은 꼬리를 내리는 법이다. 반면 평소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가 그 사람을 만나게 돼서야, 자신이 그 사람을 오랫동안 그리워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마치 배고픔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대하고서야 불현듯 공복을 느낄 때처럼, 그런 것은 때로 동물적이어서 사람의 마음을 쉽사리 뒤흔들어 놓는다. 그날 밤, 나는 학교 앞 술집을 이 잡듯 들들 뒤졌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그녀의 옷차림이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그녀가 술을 마시고 있으리라는 허황된 기대를 품게 했다. 물론 그녀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한 시간 여를 돌아다니다, 어느 술집에 주저앉고 말았다. 집에 돌아올 때는 급하게 마신 소주 탓에 억병으로 취해 있었다. 시스템을 해제해놓은 데다가 문까지 열어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일깨운 것은 집에 거의 다 도착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숨이 턱까지 차서 방문을 열어 재꼈을 때, 피부에 와 닿는 이질감이 낯설지 않았다. 캔꽂이부터 점검했다. 든 놈은 몰라도 난 놈은 안다고, 한눈에 봐도 무언가가 없어져 있었다. 콜라 캔 8?15, 그게 없었다. 황망한 마음으로 콜라 캔이 사라진 자리를 자꾸만 더듬었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갑자기 취기가 오르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까무룩하게 잠이 드는가 싶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있었다. 네가 찾는 건 여기 있어. 놀란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수 같이 날선 목소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난 여기 있어.” 소리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컴퓨터 모니터 쪽이었다. 녀석이 컴퓨터 화면 속에 있었다. 바닥을 기다시피 하여 문밖으로 나가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큰 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들어왔다. 컴퓨터 앞에 섰다. 녀석은 여전히 컴퓨터 화면 속에 있었다. “네가 찾는 8?15 콜라 캔은 여기 있어.” 녀석은 싱긋 웃더니 빨간 색 캔을 들어 보였다. 녀석의 손에 잡혀 있는 캔을 보자 몸 속의 피가 온통 머리끝으로 몰리는 기분이었다. “원하는 게…, 도, 도대체 뭐야.” “넌 나에게서 독립할 수 없어. 독립을 꿈꾸면 안돼. 다른 사람을 네 머리 속에서 몰아내는 건 나쁜 짓이야. 내, 내 캔을 왜 훔치는 거지?” 녀석은 약간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캔을 모으는 건, 나쁜 짓이야.” “내가 뭘 하던,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네 머리 속에 있는 사람들의 기념비를 세우지 마. 그건 그 사람들을 죽여 네 기억 속의 박제로 만드는 일이야. 나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꿈꾸지 마. 넌 나에게서 독립해선 안돼. 네가 독립하면 난 죽어.” “난 언제나 너에게서 자유로웠어.” 녀석은 왼쪽 입 끝만으로 차갑게 웃었다. “그래? 그렇다면 왜 나를 위한 캔은 없지?” 캔꽂이를 돌아보았다. 어느 새 캔 하나 하나가 갖가지 색깔의 비석이 되어 서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비석은 없었다. 머리 속이 온통 휘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널 죽여버리겠어.” 마우스를 붙잡고 보안시스템의 감시 모드를 정지시켰다. 그러나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녀석은 카메라 렌즈를 닫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엔?티 시스템을 종결시키려 시도했다. 그러나 마우스도 키보드도 말을 듣지 않았다. 녀석의 얼굴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컴퓨터 전원을 뽑았다. 그러나 컴퓨터가 꺼지기 전에 화면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녀석의 영상은 방안을 제멋대로 날아다녔다. 녀석은 캔 사이사이를 누비며 그곳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름과 그 이름에 연루된 사건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영상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쳤다. 그러나 녀석의 영상은 잡히지 않았다. 나란히 놓여져 있던 캔들만이 자꾸만 쓰러져갔다. 눈을 감았다. 그래도 녀석의 영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이제 내 머리 속 기억들을 하나 하나 무단으로 삭제하기 시작했다. 소리를 질렀으나 눈을 뜰 수 없었다. 머리 속이 자꾸만 비어갔다. 경고메시지가 반복되었다. “선택된 파일들을 휴지통에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라고 소리쳤지만 녀석은 거듭 ‘예’를 선택했다. 메신저는 자꾸만 물었다. “선택된 파일들을 휴지통에 버리시겠습니까?” 녀석이 모든 파일을 선택하고 ‘이후 무시’명령을 넣었다. 파일 삭제 상황을 표시하는 막대 그래프가 나타나더니 빠른 속도로 파일들이 휴지통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파일들이 소실되고 나자 메신저가 다시 물었다. “?.exe 파일은 시스템 파일입니다. 이 파일을 지우면 이 프로그램 및 시스템 전부를 사용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휴지통에 버리시겠습니까?” 녀석이 나 대신 대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모든 시스템을 지워버려. 모든 구조를 파괴해.” 컴퓨터가 녀석의 목소리에 응답했다. “?.exe 파일이 삭제되었습니다.”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내 의식은 거뭇하게 잦아들었다.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리 속의 자료는 지워지고, 체계는 마비되었다. 내 기억과 사고체계는 휴지통에 버려진 채 재활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과거로부터 자유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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