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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5월의 의미
광주민중항쟁 9주기를 기념하며
1989년 05월 08일 (월) 이대영(도서출판 인동 편집장) inews@ewha.ac.kr
 

  대열은 길었다.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대열은 도청으로, 도청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따사로운 5월의 햇살 아래 서석초등학교 뒷 골목에 앉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바라본 80년5월의 첫 모습이었다.


  그날 나는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그 거리에 있었다. 그것은 그날이 바로 검정고시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와 친구들의 불안한 눈초리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다, 조그만 성과지만 검정고시를 합격했으니 이제 조금은 기지개를 펴도 좋을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선다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나도 이렇듯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외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난 대열이 지나간 길을 따라 도청으로 향했다.

이제 막 집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 학생이 분수대 위에 올라 연설을 했고, 구호가 외쳐졌다.


  나는 슬그머니 「상대」란 깃발이 꽂힌 대열의 후미에 가 앉았다.

훌라송에 맞춘 구호들, 「투사의 노래」가 던져준 생소함마저 그저 싱그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내 인생에 기쁨이 있듯이 이 나라 곳곳에도 즐거움이 가득 내려 앉을 듯 5월의 하늘은 그렇게 푸르렀다.


  그때 나는 열아홉이었다.

그러나 10대의 발랄함과 생기를 갖춘 일상의 소년은 아니었다 .극히 짧은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인생이란 허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존재에의 회의 속에 빠져 헤메고 있었다. 손창섭 소설 주인공이 자학에 공감을 가졌고, 앙드레 말로의 「인간조건」을 읽고는 더는 견디기 힘든 허무함에 빠져 들었다. 가출과 자살 기도를 몇 번. 그것은 한반도에 태어남으로써 겪어야 했던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전라도 어느 산골에서 태어났다. 여느 시골처럼 가난과 배고픔이 많은 고향이었다. 지금 20대 후반의 사람들중 소나무 껍질을 먹어 본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인데, 어렸을 때 소나무 껍질과 잔디 뿌리로 허기를 달래곤 했으니 우리 고향의 가난은 아주 지독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의 유년도 행복한 그것이었다. 더욱이 배고픔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많이 해결되었다. 학교에서 옥수수죽과 빵을 급식으로 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난 그 급식 중 덤으로빵 한두 개쯤 더탈 수 있어, 집에 가져 와서 누나들에게 선물까지 할 수 있었다. 난 학교의 작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급식을 분배하고 남는 것을 그곳에 두었으므로 그것은 거의 내 몫이었다. 몇 번의 반공 글짓기대회에 나가 입상을 한 나를 학교 선생님들은 보배처럼 여겼고, 도서관의 책을 읽는 나를 무척 대견해 하며 남은 급식을 내 차지로 돌린 것이다.


  나는 그 빵을 가져와 특히 약간 정신이 모자란 누나에게 주곤 했다. 내겐 여섯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그 중한 누나가 날 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그래서 자주 동네 애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6학년때 그 누나에겐 안좋은 현상이 나타나고 말았다. 그 누나가 어느 달밝은 밤에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온 식구가 동원이 되어 찾아 나섰다. 누나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산으로 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 온 식구가 달밤에 산으로 올라갔다.


  누나는 뒷산 바위 밑에 쭈구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이후 누나는 자주 그 산을 올랐고, 그때마다 우리 식구의 누나를 찾는 달밤의 산행도 계속되었다. 집안엔 암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 난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1때였는데, 할아버지 제삿날 작은아버지로부터 우연히 아버지의 과거를 듣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과거 빨치산 활동으로 옥살이를 하셨고, 그때 어머니가 끌려가 맞는 바람에 누나가 정신이 부족하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믿겨지지도 않는 얘기였다. 산고에서 서당을 열어 동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분이 빨갱이였다니, 그 누구에게 확인해볼 염두도 없었다. 난 누나의 나이를 거꾸로 환산했다. 1951년 출생. 그렇다면...


  운명이었다. 반공 글짓기 대회에 나가「공산당 때려잡자」고 강조해 상을 탄 내가 「때려 잡아야할」아버지를 두었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받았던 충격. 더구나 누나의 정신 부족이 아버지의 그 빨갱이 활동으로 인한 결과였음을 알고 나서의 충격.


  나 이후로 더 이상 글짓기 대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더구나 대화를 나눈 건 「예」, 「아니오」를 빼곤 전혀 없었다.


  난 내성적이 되어 갔고, 반항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 사물에게 공격적 행위나 사고를 함으로써 자신의 충격을 해소해 나갔다.


  그리고 되도록 아버지 곁에서 멀리떠나려, 경상도 구미에 있는 공고를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반항적이고공격적인 내가 그곳의 군대식 학교생활을 제대로 해낼수 없는 것은 불 보듯 휜한 것이었다. 난 그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삶에 대한 고민, 존제에의 극심한 회의, 어린 나이에 겪은 냉소와 허무주의, 어쨌든 고교를 중퇴한 패배자란 비웃음. 나는 그 어떤 작은 목표라도 내걸지 않는 한 스스로를 지탱해 나갈길이 없었다. 몇 번의 가출과 자살기도 끝에 하나의 목표를 정해 보았다.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패배자란 비웃음만은 면해보자는 것이었다.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 서서히 건물의 윤곽이 드러나고 널부러진 도로의 모습도 눈에 뛸만큼 미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농장다리위에 앉아 있었다. 바로 앞에서는 시위 군중이 아직 남은 파출소 집기를 꺼내놓고 불을 태우며 구호를 외치기도, 누군가 앞에 나와 연설을 하기도 했다. 주로 「계엄령해제」「전두환 물러가라」라는 구호였는데, 이제 훌라송에 맞춘 그 구호를 나 역시 자연스럽게 외치고 있었다.

 

  사실 그 며칠사이 나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었다. 처음 호기심으로 따라 나선 시위 구경꾼이 숱한 파출소를 깨부수고, 불을 지른 극렬 시위군중이 되었으니 엄청난 변화인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공허한 느낌이 드는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호를 따라 외칠 대마다, 연설을 들으면 박수를 치면서마다 난 어쩌면 이방인일거란 느낌을 떨쳐 버릴수가 없었다.


  대학생들은 왜 「전두환이 물러나야하는 가」를 왜 「계엄령은 해제되어야하는가」를 조리있게 설명했지만 내겐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었다. 단지 내 눈으로, 광주시민들이 모두 그렇듯, 직접 계엄굼의 만행을 목격했다는 공통된 체험으로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또한 문득 문득 두려움이 일기도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면 그동안 한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되돌아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불현듯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틀밤을 아무 연락도 없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걱정이 태산같을 거였다.

 

  나는 대열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불확실한 싸움보다 집에가서 부모, 형제를 안심시켜 드리는게 옳은 일로 여겨졌다.


  날은 이제 완전히 밝아 어둠에 갇혀있던 모든 사물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거리 곳곳엔 싸움의 흔적이 역력했다. 깨진 보도블럭, 주인잃은 신발, 동강난 각목들, 웬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저편 도로에서 한 대의 자가용이 달려오고 우-하는 함성이 뒤따라 울려왔다. 곧이어 각목을 든 20여명으 시위 군중이 나타났다. 그 자가용을 뒤쫒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차는 미끈하게 생긴것 만큼이나 빨리 달려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달려오던 시위 군중들은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그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다 각목으로 길가의 공중전화 박스를 부셔버렸다.


  마지막 남은 공공기물이었다. 무언가를 계속 부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뒤에서 또 다시 함성이 울려오는 것이 아닌가. 뒤를 돌아다 보았다. 방금 전에 달려갔던 차가 되돌아 오고 있었고, 역시 그뒤에 수십명이 차를 쫓고 있었다. 이쪽에서 전화 박스를 부셔대던 시민들이 도로를 막아 섰다 .차는 이제 도로 가운데 멈추어 서고, 차를 운전하고 오던 중년의 사내는 부리나케 뛰어 달아났따. 시민들이  차로 몰려 들었다. 곧 부술 기세였다.


  그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차를 가로 막고 나섰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우리가 피흘려 싸우는 것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지 남의 차나 부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사유재산을 파괴하는 것은 범법행위입니다. 여러분...」


  이때 한 30대의 남자가 그 청년 앞으로 나서며 목청을 돋구었다.

「뭣이며? 범법행위!··· 이놈의 차가 으떤 놈들이 타는 차간디. 다 우리를 못살게 굴었던 놈들이 타고 다니는 차여!··· 이런 놈들의 차는 당장 깨부러야 써! 그려, 안그려? ···」


「아, 거 말 한번 씨원허게 헌다. 아 말이야 바른 말이제만 그런 놈들이 공수부대 시켜 사람 죽인 놈들이여··· 못산 놈들 등쳐먹는 놈들은 다 그놈들과 한패여! 한패!」


「그려, 맞어」


「와-」


  승부는 곧 결판났다. 차는 불길에 휩싸였고 시민들은 거기에 돌멩이를 던졌다. 차를 막아 섰던 대학생 차림의 청년은 쓸쓸히 돌아서 멀어져 갔다.

그런데 그때 또 한 대의 차가 나타났다. 이번에 영업용 택시였다. 나는 한순간 긴장했다. 저 차도···. 그러나 나의 우려는 기우였음이 곧 밝혀지고 말았다. 시민들은 도로에 널려진 유리며 큰 돌멩이를 치워주며 그 영업용 택시를 환송해주는 것이었다 .


  뭔지 모를 감동이 가슴 저 밑바닥으로부터 전해져 옴을 느꼈다. 한편이라고 하는 것 이해가 일치한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감동이었다. 외국과 축구경기를 할 대 당연히 우리 편을 응원하듯, 그 광경은 내게 깨뜨리는 자들과 한편이라는 당연한 심정을 의심할 여지 없이 받아들이게 했다. 그리고 이 싸움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며, 우린 승리해야 한다는, 승리할 수 밖에 없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우리편이 훨씬 많으니까.


  나는 거리를 내달렸다.

거리의 모든 풍경이 정겹게 여겨졌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와 형수님이 걱정스레 맞았다. 난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가 큰 절을 올렸다. 의아해 하시는 아버지의 방문을 나서며 난 속으로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는 죄가 많은 사람들 편에 서신 거였습니까?」


  광주는 해방을 맞았다. 고귀한 넋들의 피 위에 해방의 꽃은 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해방공간은 적들의 야수적 살육으로 무참히 붕괴되고, 우린 또 다시 싸우고 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또 무엇인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대단하다. 특히 내게는 80년 5월이 주는 의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방황과 좌절속의 나를 일으켜 세워준 사건이었으므로.


  또 다시 5월이다.

그해 이후 처음으로 광주가 아닌 타지에서 맞는 5월이다. 20대 후반의 나이에 먹을 것을 찾아 떠나 온 서울.


  그러나 역시 5월은 계절의 여왕인듯 서울 하늘도 맑고 푸르기만 하다.

신록 우거진 5월 하늘에 함성 가득 울려 환한 세상 맞을 날 기다리며 5월 단상을 두서없이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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