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때의 친구들을 만난다는 것은 공연히 즐거운 일이다. 졸업한 지가 벌써 14년이 넘었으니 자타가 공인할 수밖에없는 중년줄에 들어서가는데도 모이기만 하면 금방 세월을 뒤로 건너뛰어 옛날의 활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얼핏 그 옛날과 마찬가지로 발랄한 것 같이 보이는 활기는 화제가 학교 다니는 아이들 얘기, 맛있는 음식, 음식점 얘기, 증권 이야기 등으로 흘러가면서 안개 걷히듯 사라져버린다. 얘기가 한참 진행될수록 오히려 뭔가 모를 쓸쓸함과 공허함이 감돈다.

 왜 그럴까? 그 옛날의 발랄했던 젊음의 아름다움은 잃었지만 오히려 더욱 더 세련되어진 아름다움이, 안정된 생활에서 오는 여유있는 표정과 고상한 옷차림 속에 삶의 성숙함과 풍요로움을 한껏 구가해야 될 것 같은데도 말이다.

 옛 동창생끼리의 만남이 과거의 것에 대한 그리움일 뿐 현재의 삶, 미래의 삶에 서로 의미있는 관계로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러한 측면도 없지 않으나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 있는 듯하다.

 나는 여성운동단체에서 같이 활동을 하는 또 다른 무리의 친구·동료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들도 만나면 애들 얘기, 남편 얘기 등 살아가면서 접할 수밖에 없는 주변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나 바로 그 자질구레한 주변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삶의 질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하고, 우리의 만남은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이 사회구조적 차원의 문제와 연결되고 있음을 생각하며,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같이 해결해 나가려 하는 공동의지를 지닌 공동체적인 만남이다.

 그러기에 여성운동단체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동료·후배들과의 만남은 진정한 활기로 가득하다. 나는 동창들을 만나면 영어성경공부도 좋고 골프나 수영·테니스도 좋지만 소위「운동」에 참여하기를 진정 그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권하고 싶다. 그러나 쉽게 말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이미 그 점에 있어서 우리들의 생각의 골은 깊이 패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좀 산다하는 사람들의 진보적인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도 몹시 크다. 주변의 친척들·친구들을 보면서 항시 느끼는 문제인 것이다.

 대학 시절 불합리하고 비민주적인 우리 사회를 보며 분노하던 친구들, 우리 사회를 제대로 알기 위해 꽤 많은 양의 독서와 토론에 열심이었던 친구들, 나름대로 변화에의 의지와 희망을 안고 실천적 활동에 몰두하던 친구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야무졌던 친구들의 변화를 내가 갑자기 느끼기 시작한 것은 대학 4학년 봄학기 시작 때 부터이다.

 4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친구들의 옷차림이 달라지고 얼굴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삶보다는 평범한 삶을 택하고 싶다며 총명했던 눈매, 민중과 민족을 이야기하며 열기에 들뜬 이마가 빛을 잃어갈 때부터 친구들이 달라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범한 삶」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흐물흐물한 아메바처럼 무너져가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운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소위「운동」을 하려면 뭔가 비장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하며, 그것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언가 별난 사람들,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위 혁명가를 꿈꾼다거나 유별난 이상주의자거나 아니면 영웅이 되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으로 말이다. 사실 운동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은 고달픈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떳떳하고 보람이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앞당기는 운동에 참여한다면 소위「운동」하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고달프지만도 않을 것이다.

 이미 대학을 졸업할 때쯤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식의 선택이 가까왔던 친구들의 사고방식의 간격을 크게 벌어지게 하였다. 보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삶의 하나로 운동에 참여한다면 개인의 삶의 의미가 자아실현의 의미가 더욱 커지며 나아가 보다 바람직한 우리의 앞날이 앞당겨짐은 물론 동창생들끼리의 만남도 보다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이혜경 (75년 사회사업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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