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시인 박노해, 백무산을 중심으로

「노동의 새벽」이 세상에 출현하자 그것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실은 그것을 충격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우리 문화운동의 수준이 충격이었지만). 이런 현상은 당시의 진보적 문학운동 진영에서뿐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부르조아 문단에서조차 호들갑을 별스레 떨었던 것에서도 그 파장의 넓이가 어떠했나를 감득해볼 수 있다.
 그 이전까지의 유동우의「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나 송효순의「서울가는 길」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시, 수기 등의 왕성한 생산물이 없지 않았던 바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당시 논자들에게 있어서는 소극적 자기반성의 의미 이상을 넘지 못하였다. 그러나,「노동의 새벽」은 전혀 다른 양상의 반응을 유발시켰는데 그것은 작품내에 철저히 관류하고 있는 구체적 현장성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더불어 객관현실을 탁월한 현실주의적 예술방법으로 구현했다는 높은 예술적 성취에 연동되어서였다.
 이러한 평가에 걸맞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노동현실의 구체적 체험에 깊이 뿌리박고 그 현실의 나날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절망과 슬픔, 원한과 분노의 정서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요소들이 새롭게 건설되어야 할 새 세상을 향한 주체적 일어섬 속으로 녹아들어가 그 주체의 의식각성을 일궈내는 노동해방의 정서와 결단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편의 전반에서 확인되다시피 시인은 노동현실 내외의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 드러난 문제와 가려진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음으로해서 그것의 폭로와 전복을 목적의식적으로 기도하고 있는 바 이 의도의 집약적 표현이「노동의 새벽」인 셈이다. 이 시집을 통해 노동현실의 형상물이 가져야 하는 자기본연의 역사적 정체, 즉 노동자의 계급적 자기정체의 획득과 혁명적 전투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편들은 당시 누구보다도 뛰어난 현실주의적인 수법을 가장 기본적인 창작방법으로 취하고 있었다. 현실주의란 것이 객관현실의 발전속도 및 그 질이나 체적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그 반영의 의미망에서 미래전망의 합리적 핵심을 포착해야 하는 것이라면「노동의 새벽」은 그것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이 시집이 노동현실이라는 스펙트럼을 통해 남한 사회의 기본모순인 노자간의 숙명적 대립과 그 모순의 현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또 그 극복의 대안으로「노동해방」(물론 이 이념실현의 과정적 방법으로까지 전화되지는 못했었지만 예술적 선취라는 명제에 비추어볼 때 그것이 관념적 대망 이상이 되지 못한다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을 제시하고 있는 측면에서 목도되는 바이다. 이러한 성과가 곧「손무덤」이나「지문을 부른다」에서 확인되는 맹아적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계급적 관점만이 가지고 있는 현실의 수용범위가 현실주의적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지면사정상 아주 도식적이나마「노동의 새벽」이 이룩한 성과를 살펴보자.
 첫째, 이 시집은 철저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노동자 계급의 생활과 의식 전반에 걸친 다양한 측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상의 묘사가 수미일관하게「노동해방」이라는 지향점으로 향해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 계급의 근본적 해방을 추동하는「노동자 계급 당파성」을 맹아적이나마 구현하고 있다. 셋째, 당시 문학운동의 불철저한 지도이념이었던 민족문학론에 반하여 하부토대의 변화에 재대로 조응할 수 있는「노동자계급문학」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넷째,「투쟁하는 노동자」의 전형성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자계급현실주의의 가능성을 드높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작업에는 그 성과에 못지않는 여러 한계를 노출시켰는데 그것의 탐색이 박노해라는 시인의 총체적 면모를 살펴보는데 있어서 올바른 수준이리라. 그러나 그 한계는 당대 노동운동의 수준과 한계에 연동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 한계의 첫째는「노동의 새벽」이 수용하고 있는 남한사회에 대한 인식이 아직 총체적이지 못함으로 인해 신식민지성의 특징인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민중의 이익을 결합시키는 전술적 과제의 형상화가 부족하였다.
 둘째는 그 인식의 폭이 전면적이지 못함으로 인해 타계급에 대한 정책 및 전략, 전술이 추상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타계급에 대한 형상화가 부족했다는 점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한데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문제와 그 처방에 대해서도 일련의 대안을 제시함으로써만 주력군으로써의 위상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아쉬운 대목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러나 박노해의 근작시는「노동의 새벽」에 내재되어있던 한계를 성큼 뛰어넘는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의 활동면모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 이전까지는 노동자 계급「대중운동」의 현장에 기초하는 미학사상에 시작의 근거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 대중운동의 역정을 마감하고「전위운동」의 최첨단에서 세계의 모든 현상을 인식하고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려된다. 이 말은 다름아니라「대중운동」과는 달리「전위운동」의 실천가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현실인식의 총체성 즉 치밀한 변혁이론과 강철같은 정치사상 그리고 사회전부면의 병리현상을 정확하게 읽어내야 한다는 객관적 과제가 그의 시작(詩作)에 직결되어있다는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먼저 그의 정치사상과 세계관상의 변모가 어떤 변화를 낳았는지 살펴보자. 우리는 앞에서 시인이 파악하고 있는 남한의 성격이 총체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했었다. 그러나 근작에서는 그신 식민지성과 국가독점이라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내용을 선연히 체득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에 따른 변혁과제인 반제반파쇼에 대한 형상화가 적극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노동해방투쟁의 형상화와 더불어 민중의 공통과제인 반제투쟁(「조선사람껍질」,「노동해방문학」8월호), 통일투쟁「교원노조타도하고 성자조합 결성하자」,「익사라고 우겨뿔자」같은 책 등이 형상화되고 있으며「소를 찌른다」,「죽창을 들고」등에서 보이듯이 농민현실에 대한 치밀한 천착이 농민투쟁의 전범으로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초기의 한계를 돌파한 한 전형이다. 이러한 질적 제고가 그저 당위적인 의식이나 노력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리라.
 이러한 변모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전형이 객관현실의 발전형태가 요구하는 인물상에 정확하게 부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목도되는 바이다.
 전형이란 것이 당대에 객관적으로 요구되는 중심인물의 위상이라면 그의 시에서 선진노동자가 중심적인 전형(「저 아이가」「배포자의 꿈」등「노동해방문학」창간호)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 당대성의 반영이라는 의미에서 그 요체를 분명히 육화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그의 초기 시에서 나타난 소재선택의 제한과는 달리 근작시에서는 그 소재와 주제의식이 우리생활의 전 부면으로 확대되어 자본주의 사회가 낳는 제반모순의 모든 현장을 예의 노동자 계급당파성의 관점에서 그것의 본질을 철저히 추적하고 폭로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의식의 레이다가 현실의 모든 부분으로 뻗쳐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 인식의 심화는 따라서 인신매매, 산업재해, 성의 상품화, 여성문제, 투쟁생활 등에 대한 포괄적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구체성의 향도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 세계의 확대는 시인의 시야가 우리의「계급적」생활「총체」에로 넓혀져 있음을 반영하는 바이며, 이와 함께 계급투쟁의 최전선과 후방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박노해의 근작시에서 시인 자신이 과학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문제의식의 일단이 현실주의적 형상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철저한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입장에서 구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박노해에 못지않은 또 한 명의 노동자 시인이 백무산이다. 시에서 보여지는 그는 박노해와 더불어 상대적인 의미에서 현단계 최고수준의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구현한 시인으로 손꼽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는 역사에 있어 노동자 계급이 지역과 민족을 넘어서서 차지하는 국제주의적 역할에 대한 당당한 인식까지 갖추고 있다.
 그 역시 독점대기업의 노동자로 시작하여 선진노동자로 성장했다는 전기적 사실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한 신원적 경향이 아닌, 그의 시 전면에 드러나는 노동자 계급 정서의 풍부함이 바로 현실에 존재하는 전형의 실물적 반영에 육박할만큼 생생하고 구체적이라는 것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시들은 노동현실의 현상을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노동자 계급과 민중을 짓누르는 고통의 근본원인에 대한 본질적 인식의 차원으로 더욱 심화되어 있다.
 이제는 그의 시가 일관되게 노동자 계급 당파성을 구현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모순의 뿌리로부터 모든 사물을 인식해나가는 총체성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되는 바인데 이 점이 바로 그의 시가 확보한 높은 수준의 근거점이다.
 그리고 백무산의 시에는 대단한 대중성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시인이 대중의 무차별한 요구의 평균치를 반영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가 전선의 한복판에서 철저히 계급적 관점에 의해 울려 퍼져나오는 싸움의 미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가 대중추수나 경험주의적 진리관에 걷혀버리지 않는 것은 상술한 바처럼 당파성의 일관된 구현에 안착되어 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에 따르는 그의 당당한 계급의식은「경찰은 공장 앞에서 데모를 하였다」라는 절묘한 상상력의 시편들을 뽑아 내는데 이것은 정치적 상상력과 예술적 상상력이 긴밀히 결합되어 나타난 현실인식의 또 다른 형태이다.
 즉, 이것만이 범박한「상식」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가능하기에「온산공해단지에서」연작과「공구와 무기」연작, 그리고「우리의 가슴이 붉어지기 전에는 진달래꽃은 피지 않는다」등 이데올로기 문제와 공해 문제 등에 대해서는 노동자 계급적 입장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국의 노동자여」에 실린 시들이 몇 편을 제외하고는 노동운동의 질적 변화기인 7,8월 노동자 대투쟁이전에 쓰인 것이라는 사실과 그 이후에 성취하고 있는 그의 발전면모(이는「노동해방문학」5월호의「꽃병을 만든다」등에서 확인해보게 된다)을 감안해볼 때 앞으로의 기대는 더욱 막대해지는 바이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