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꿈꾸는 자리에 안개는 흐르지 않고
그대가 꿈꾸는 자리에 안개는 흐르지 않고
  • 이대학보
  • 승인 1989.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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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꿈꾸는 자리에 안개는 흐르지 않고

  최윤경 (외국어교육학과 2)

1
그대가 수상해요
뼛속까지 주저앉으며 비가 내리는
온 여름 방구석에서 낡은 책장 뜯어 불지피고
활자 말아먹었다는 그대, 그대가 사랑하던
칼날질 언어 명징한 무기, 수상해요
추위에 오그라들어가는 그대 등뒤로
발 한자락 담글 수 없는 거친 물살이 보여요

2
안개는 어떠한 징조가 아니다 안개는
공장굴뚝에서 생산해내는 현대의 풍토병이 아니고
몽환의 울먹거림도 아무 것도 아닌
안개일 뿐이다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때로는
물살보다 깊고 빠르게 흘러가는
미세한 강이 되고 이른 새벽에서 저녁까지
허물을 벗으며 흘러간다 안개속에 가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분해되고 신선하게 조립되어
드러나지 않게 길을 간다

3
그대가 주저없이 헐벗은 잔등에서
먼지처럼 돌돌 말린 사랑을 추려 보여준다 해도
그대의 방은 사소한 온기 한가닥 없는 얼어붙은
무지개인 걸요 날 속이지는 말아요
선명한 그대 뼈마디, 그대의 무기는
난폭하게 단절된 욕정과도 같아요
이음새 연신 삐걱대며
단 한번도 아름다운 적이 없는
부드러운 안개조차 스며들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