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풍, 58년부터 학내외 문제 파헤치는 "약방감초" 노릇

 학보를 받아들면 으례히 사풍부터 찾는 버릇을 지닌 이화인은 무척이나 많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58년 9월 15일 제35호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지금까지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아온 사풍, 본래 사풍이라는 것은「四風」으로, 동서남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뜻하며 학교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을 시시비비하는 고정가쉽란이다.
 학보에 사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이전에 가쉽란이 선보인 것은 1956년 2월 15일 제18호부터이며, 학교생활·학생주변에서 흘려버리기 아까운 기사들을 단편 형식으로 실었다. 이 때는 가쉽의 제목이 없었고, 20호에서「직언만평」, 22호에서「한담여화」등 불규칙적으로 나오다가 현재의 사풍이 등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편집위원이던 교수들이 직접 집필하였는데 체계가 잡히고 학생들의 참여가 높아지면서 1959년 50호를 전후하여 학생기자의 고정란이 되었다.
 1958년 9월 15일자 제35호에서는「○-웃음과 야유속에서 마음의 부채를 덜고 시비와 고언속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희고하고 예찬과 찬미에서 삶의 보람을 느껴보자」라고 사풍의 개점 인사를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900호 특집을 맞아 학보의 나이와 거의 비슷하게 오랫동안 학보의 한 귀퉁이를 지켜왔던 사풍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봄으로써 그간 이화내외의 상황과 변화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1983년 전까지 사풍에서 주로 다루어져왔던 주제를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학생생활이 약 45%, 학교행정이 16%, 학교앞 문제 8%, 교수동정 7%, 시설관계 8%, 사회문제 7% 등이다. 그러던 것이 83년 이후부터는 교내상황 50%, 교외문제 50%의 비율로 정착되었다.
 학생생활 문제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사풍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거의 일치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즉, 사치풍토·축제·등록문제·채플·도서관 문제 순인데, 지금의 사풍과 주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 점은 위와 같은 문제들이 이화인들의 논란의 대상이었고, 가장 큰 관심사였다는 당위적 측면과 더불어 이화문제에 대한 계속적인 비판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선 사치문화에 관계된 사풍을 살펴보면「○-작년 가을에야 겨우 진촌신세를 면한 이대입구에서 이화교까지 불과 150M쯤 밖에 안되는 사이에 상점들이 빈틈없이 자리잡고 있다.~ 제일 먼저 양복을 맞춰입고 양품점에 들러서 치장하고 구두를 고친 후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하고 다방에 가서 물을 마신 후 과자점에 들어갔따 나와 서점을 들여다 보는 셈이니 학생이라는 이름의 여자들이여! 서점부터 들리는 게 어떻겠읍니까.(1960년 6월 20일자)」라고 쓰고 있다. 29년이 지난 지금에도 서점만은 여전히 2개인 것을 생각해 볼 때 이화인들의 사치풍토는 가히 전통적이라고 할만하다.
 이런 점에서 소비문화의 최전선으로 여겨지는 이대주변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원동력은 이화인 스스로의 인식변화라는 것을 사풍에서 계속 강조하면서 풍토개선을 위해 노력해왔던 것으로 풀이해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풍 세 개를 소개한다.「○-지난 주말 K대생들이 몰려와 사치풍토 배격시위를 벌여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이들은 유인물을 통해 본교생을 규탄하면서 8천여 이화인이여, 그 화려한 옷을 벗어라 등의 극단적이고 과격한 표현으로 반성을 촉구했다(1971년 10월 4일자)」,「○-이대생의 복장의 다양화는 주지의 사실인데~ 이번 국제 학생 세미나에 참석한 대표들도 본교생 복장에 관심을 나타냈다고. 예년보다 훨씬 검소해진 복장에도 불구하고 외부인에게는 아직도 화려하다는 인상이 짙은 듯.(1970년 6월 1일자)」,「○-도서관 책 많다 우쭐대도 무슨 소용. 명실공히 대학 앞 쥐구멍만한 서점마저 구루마 바람에 날아갈 판인데~ 이화로 망치는 사치소비귀신. 바쁜 걸음 붙잡는 질서문란 귀신 훠이 물러가라이!(1989년 5월 8일자」
 채플이 사풍에 등장한 빈도도 무시못할 만큼 많다. 예를 들면「○-강의시간엔 한 건의 질문도 없이 과묵한(?) 학생들이 예배시간만 되면 혀의 기능이 촉진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C교수는 이 현상을「혀의 부활」이라고 꼬집었다.(1968년 4월 29일자)」,「○-신앙강조주간은 고학년이나 저학년이나 연사를 앞에 두고도 참 열심히 떠들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 모양.(1973년 5월 14일자)」등을 들 수 있다.
 물론 학생들의 주체적인 참여로 채플의 형식개발 등 공감대를 형성해보려는 시도 없이 잡담을 즐기는 등의 태도는 지적할만 한 것이었으나, 학생들만 비판함으로써 문제해결은 학생과 학교측이 함께 하려는 노력 속에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하기도 했다.
 도서관 문제 역시 사풍에서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는데「○-신관: 판자집의 별칭. 도서관: 자습실이나 대합실의 별칭(1959년 9월 1일자)」,「○-도서실의 분위기는 대개 엄숙하다. 그런데 왠일인지 우리 도서관의 열람실은 늘 어수선하고 무엇인지 옆사람과 쏘곤쏘곤대로 껌씹는 소리가 요란하다. 우리의 도서관이 휴게실이냐, 열람실이냐.(1959년 5월 1일자)」등이다.
 또한, 학기가 바뀔때마다 학생들의 등록고역의 문제는 사풍에서 빠지지않고 등장하고 있는데「○-1년에 두 번씩 학기가 바뀔 때마다 학생들은 이화의 전통있는 명물 중 하나인 등록의 고역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1961년 9월 4일자)」,「○-교과목 등록이 실시되었던 지난주는 온통 줄, 줄, 줄의 연속이었는데 학관부터 도서관까지 마치 전쟁중의 피난민대열을 연상시켰다고.(1982년 6월 14일자)」개선이 절실히 요구되는 등록고역의 문제에 대한 사풍자의 성토는 학교측에 개선을 촉구했다.
 5월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축제」와 이미 제도적으로 사라진「메이퀸」에 관련된 사풍은 내용도 가지가지며, 웃지못할 사건들이 만발했음을 보여준다.
「○-메이퀸 선발을 끝내고 한 턱의 붐이 부는데, 그 임자들은 과의 퀸 후보들이고, 적극 밀어준 데 대한 답례라고. 지금까지 가장 푸짐한 메뉴로 알려진 것은 문리대 모과의 바나나 3개와 아이스크림이라는 것.(1968년 5월 13일자)」,「○-세칭 일류대학 S대에서 일부 ROTC생들이 이화잔치에 참석코자 토요일 실시될 행군훈련의 연기를 요구했다고.~ 그런데 그들 신문은 우리대학에 망국론을 들먹였다니. 본교생이 강요한 꼭두각시놀음도 아닐텐데. ~그들이「이대생의 잘못된 정신 고쳐주기 운동」을 벌이겠다니 막중한 훈련보다 쌍쌍파티 가겠다고 훈련연기하자는 그들의 정신이야말로 고쳐야 할 운동방향임을「대학살롱」담당자에게 충고드립니다.(1970년 6월 8일자)」그간「메이퀸」등 축제가 지니고 있던 비민주적 요소들-가진자와 못 가진 자간의 괴리된 놀이문화, 허위적 미의식, 소비문화 등-에 대항하고, 공동체적 의식을 공유할 건강한 문화제를 이끌어내려는 사풍자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부족하였던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편, 80년대 전까지는 10%내외의 저조한 비율을 보이긴 했으나, 민감한 시대적 문제는 사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우선 4·19 시대의 사풍을 살펴보면「○-이 나라 새로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워놓고 장히 가버린 우리 학도들의 명복을 빌며 삼가 머리를 숙인다. 우리는 이번 4·19 데모에 거교적인 참여는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 행사에 줄지어 따랐다. ~이제 구구하게 불참의 원인을 따지기 보다 진정 이 마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역사위에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 뿐일게다.(1960년 5월 17일자)」라고 정의의 대열에 앞장서지 못한 이화인을 책망하며 새 역사의 주이니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풍은 80년 계엄령철폐시위를 계기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게 된다.「○-노래, 구호들로 지칠 줄 모르며 하얗게 세운 E양들은 학교를 한바퀴 행진하며 밝아오는 새벽을 힘차게 맞았는데.(1980년 5월 12일)」
 80년 5월 12일 사풍은 안기부 검열로 삭제된 부분이 여백으로 나오는 사태도 있었다.
 그러나 80년 5월 계엄령이 발효되고, 113일간의 휴교와 더불어 학보가 나오지 않게 되자 이후 사풍자의 입은 막혀버리게 되었다.
 1982년에야 비로소 다시 시작된 사회비판적 성격은 1983년 문예지에 대한 자유조치를 계기로 크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2년 만에 터진 매캐한 연기 속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E양들(1982년 9월 27일자)」,「○-피안의 언어「민주」세태가 하수상하게 돌아가는데.「타는 목마름」으로 만세 부를 E양 누구요.(1983년 5월 16일자)」,「○-강연회 취소로 이화대학에 삼엄한 검문이 펼쳐지던 바로 그 날 저녁 불온한(?) 유인물 소지했다는 혐의로 우리의 기자양 파출소 방문할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고.(1984년 9월 24일자)」이렇게 민주대열에 함께할 것을 촉구하면서부터 사풍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83년 이후 주목할만한 사건으로는 87년 6·10총궐기·단독올림픽반대·89년 학원탄압·조국통일 투쟁 등을 들 수 있는데 간략하게나마 이 사건들이 사풍을 통해 어떻게 평가되었고, 인식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간의 변화를 느껴보기로 하자.
 1987년 6월항쟁 시기의 사풍에서는「호언」과 독재정권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이화인들이 전체 사회 민주화 흐름에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호언」「차기어르신네 추대」는 백성뜻과 무관함이 명약관화하니. 국민의지모아「6·10총궐기」에 동참하길 바라오(1987년 6월 8일자)」
 또한,「○-사상최대의 에이즈올림픽 만세 외친 윗어르신들, 외국인 검진조항 삭제에 노고가 많으신데. 올림픽이 만병통치약이라더니 에이즈는 또 뭐꼬.(1988년 9월 19일자)」,「○-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하나된 세계 이루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38벽부터 우선 허물어야 하지 않겠소?(1988년 9월 26일자)」,「○-스포츠 세계4강=강대국 순위로 착각하는 윗분들. 설겆이까지 백성고혈로 치루려는 그 고약한 심보부터 고쳐보시구려.(1988년 10월 10일자)」에서 보이듯이 반쪽올림픽, 반민중적 올림픽에 대해 철저히 민중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까운 89년 사풍은 어떠한가?「○-백발 날리며 통일선구자된 문목사. 북한 바로알기 계획짠 한겨례 이교수 알고보니 둘 다 무시무시한 간첩이었다나. 겨례양심 공작원으로 둔갑시키는 안기부, 온갖 조작 설쳐도 민주투사 일편단심은 꺾을 수 없을껄.(1989년 5월 8일자)」,「○-민주세력 소탕음모 E양에게까지 뻗쳤다는 소식. 신성한 배꽃배움터에「수색영장」이 그것이라고. ~순결한 상아탑, 군화 발자욱으로 얼룩질까 두려워~낭자들, 꿋꿋하게 맞서야 할 것이오.(1989년 7월 24일자)」이렇듯 89년 학원탄압과 조국통일 투쟁과정에서 이화인들의 자발적인 민주화 의지를 이끌어 내는데 사풍이 한몫을 담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사풍은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이화내외의 많은 문제들을 날카로운 시선과 번뜩이는 재치로 지적해왔고, 개선을 당부해왔다. 즉, 학내의 문제점과 미담을 발굴해 내면서 이화인과 학교와의 관계를 발전적으로 끌어내며, 자발적으로 함께 하는「이화」의 풍토를 마련하려 했다는 점, 교외의 경우 지나치기 쉬운 사회의 문제들을 날카로운 비판과 정확한 관점으로 올바르게 지적해내고, 이화인에게 무분별한 민중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진솔하게 전달, 독재정권 본질을 폭로하며, 대항해가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 위상을 잡아왔다.
 그러나 외래어의 빈번한 사용과 문제의 정곡을 말장난으로 끝낸 경우도 있었으며, 기자우월주의에 젖어 있거나, 상투적인 주제를 잡고 비판논리를 비약시켰던 잘못도 많이 범하여 왔다.
 앞으로 사풍이 더 많은 공감을 확보해내기 위해서는 오염된 말장난으로 장식된 시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풍자의 깊은 고민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지한 문제의식으로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움과 웃음을 선사해야 할 것이다.
 항의도 많이 받고 문제도 무수히 지적받아오면서 30년간 발전해 온 사풍이지만 다른 어떤 기사로 문제를 다루었을 때보다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으로 사풍자의 변명을 대신한다. 사풍은 앞으로도 더욱 이화인의 고민과 불만들, 미담들을 함께 해결해나가는 장으로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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