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7일(목) 밤10시. 조모임을 끝낸 김희진(가명)씨는 어김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대학로의 한 바(Bar)로 향했다. 라이브 공연 반응을 체크하고 뒷정리까지 모두 마치니 시계 바늘은 벌써 새벽3시를 가리켰다. 녹아내릴 듯 피곤하지만 바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택시비를 아껴야 하니까. 2시간 가량을 기다렸다가 첫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어느덧 새벽5시반이다.

김씨가 현재 버는 돈은 한 달 60∼70만원 가량. “다른 애들처럼 아르바이트비로 맛있는 거 마음껏 사먹고 영화도 보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네요. 우리 가족 식비·핸드폰 요금·가스비·아파트 관리비… 쓸 곳이 많아요”

아버지, 여동생 두 명과 함께 사는 그는 가장이나 마찬가지다. 당뇨를 앓고 있는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한다. 아버지 수입으로는 아파트 월세 50만원과 세금 등을 낸다. 버는 족족 모자라는 생활비에 보태다보니, 한 달 동안 희진씨가 자기 용돈으로 쓰는 돈은 차비를 포함해 10만원 안팎이다. 등록금도 틈틈이 모아야 하는데 당장 먹고살기 바빠 좀처럼 그럴 여유가 없다.

01학번인 김씨는 이제야 4학기를 이수하는 중이다. 지난 수 년간 그의 삶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처음 입학했을 때도 TV에서 나오는 낭만적인 대학생활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르바이트 하느라 OT에 못 가서 친구 만들기가 힘들었어요. 그때 중학생이던 막내 동생 학교에서 부모님을 부르면, 별거 중인 엄마와 바쁜 아버지 대신 제가 가야 했죠. 일은 또 일대로 해야하니까 이래저래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어요”

그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휴학을 하며 대기업 품질평가단·나레이터·빌딩 안내원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간신히 등록한 학기에도 사건은 연이어 터졌다. 2002년 4월 배가 아파 검사를 받았다. 난소암이었다. 두 달을 교실 대신 병원 침대에서 보냈다.

종양 제거 수술을 마치고 1년을 쉰 후 복학을 했다. “학교는 계속 다니고 싶었으니까요. 그땐 정말 아르바이트 안 하고 공부만 하고 싶었는데, 그게 참 마음대로 안 됐어요”

그 당시 월세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전에도 모아둔 등록금을 몰래 가져간 적이 있는 어머니한테 계약금을 맡긴 게 실수였다. 입주를 다 마쳤는데 집 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계약금 중 일부를 못 받았다고 했다. 식구들이 당장 길거리에 나 앉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하는 것. 새벽까지 서빙이나 바텐더 일을 하다보니 오전 수업에 못 가는 날도 많았다. 몇 년간 수 차례 속을 썩여 왔던 어머니는 계약금 문제가 드러난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

학업에 열중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결국 학사경고 세 번으로 제적 통보를 받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에게도 차마 슬픈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부를 계속 하고 싶은 가슴의 불씨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했었어요. 계속 학교에 다녀야 하나, 난 돈을 벌어야 하는데. 그런데 막상 제적당하고 쉬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장래가 막막하더라구요. 무엇보다 열심히 한 번 다녀보지도 못하고 그만두게 된 것이 안타까웠어요”

그렇게 이화를 떠나 생활한지 약 2년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학교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재입학 신청을 했다.

그의 바람은 현실로 이뤄져 올해 다시 이화인이 됐다. 전공 학부에 여석이 생겨 교수회의를 거쳐 재입학이 승인된 것이다. 허가를 받은 날, 교수님을 만나고 집으로 가는 내내 하염없이 울었다. 두 번째 얻은 기회이니만큼 조금 더 독하고 강해지리라. 2년 새 훌쩍 오른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해결했다. “남들 공부할 때 저는 못 했잖아요. 욕심이 나요. 게다가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는데 돈 아깝지 않으려면 열심히 들어야죠. 생각도 많이 하고 책도 더 보게 되네요”

말하기 어려울 법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서도 김씨는 눈물 한 방울 떨구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중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성격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가 비관하지 않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다름아닌 가족이다. “첫째 동생은 지금 스스로 돈 벌면서 매달 20만원 가량 생활비를 보태요. 간혹 밤에 모두 모여서 밥을 먹는 날이면 서로 설거지 안 하려고 가위바위보 하고, 아주 난리법석이에요”라는 말에서 행복이 엿보인다. 비록 세 자매가 한 방을 쓰는 좁은 집이지만 희진씨는 가족들이 있기에 세상이 밉지 않다.

2006년도 다이어리를 산 날, 그는 첫 장에 막내 동생과 찍은 스티커 사진을 붙였다. 한 마디를 덧붙였다. ‘모든 것을 추억이라 생각하자. 죽이든 밥이든 코미디건 비극이건 간에, 사랑하고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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