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of Ewha

학생운동을 빼고는 대학문화를 논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4·19 혁명의 열기로 가득했던 60년대, 7월 유신체제로 얼룩진 70년대, 5·18 광주 민중항쟁과 6월 민주항쟁으로 달궈졌던 80년대의 대학가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이화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 4월19일(화) ‘3·15 부정선거의 원흉 현 자유당 정부는 퇴각하라’는 구호 아래 2만명 이상의 학생과 시민이 평화 시위를 펼쳤다. 이 시위에 이화인 3백여 명이 참여했고, 본교 동대문 부속병원에서는 시위로 부상당한 환자 수십명을 치료하기도 했다. 이후 학내 곳곳에서는 학술대회·집회 등 4·19 정신을 이어받자는 움직임이 꾸준히 일어났다.

‘불운의 시대’로 불리는 70년대. 4·19 혁명이 무색하게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 이에 ‘토강회’, ‘새얼’등의 사회과학 연구 동아리가 생겨나 이화인들의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대강당에 유신철폐를 지지하는 유인물이 배포됐고 주동자가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은영(사회·80년졸)씨는 “그 사건을 전·후로 채플시간에도 뒤쪽에 중앙정보부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탄압에도 학생들의 민주화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80년대 학생운동의 흐름은 ‘군부독재’를 없애려는 움직임으로 설명된다. 80년에는 광주 지역의 학생과 시민을 탄압한 5·18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전국 대학가에서는 ‘군부독재 종식’을 외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는 87년에 절정을 맞이한다. 이것이 ‘6월 민주항쟁’이다. 6월 민주항쟁도 이화를 비껴가지 않았다. 전제현(기독·91년졸)씨는 “이화광장에 발 디딜 틈 없이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집회를 열었다”고 기억했다.

결국 87년, 6·29 선언으로 학생들의 오랜 민주화 열망은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90년을 기점으로 학생운동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운동권 내부에서 노선의 차이로 갈등을 빚었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나 정치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저하했기 때문.

전 대학가를 휩쓸었던 학생 운동의 열기는 90년대에 접어들며 점차 식어갔고 2000년대에는 관심 있는 몇몇의 활동으로 국한되기에 이른다. 2004년 3월29일(월) 자 이대학보는 ‘대학생 정치참여 꼭 필요한갗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88.4%의 이화인이 ‘대학생의 정치 참여는 필요하지만 참여할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다함께 이대모임 조지영 대표는 지금의 학생운동은 꾸준한 움직임이 아니라 한 계기로 터졌다 다시 분산되는 것이 특징이라며 “하지만 정치적 계기만 충분하다면 학생운동은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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