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참관기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
폐막제(Closing Celemony) 당시, 참가자들이 한영애의 노랫말에 담긴 삶의 농후함에 대해 몰랐더라도 함께 열광할 수 있었다는 것, 아마손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다함께 그 리듬에 몸을 맡겼다는 것, 그 모든 것에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이 있었다.

또한 5일동안 이뤄진 수백개의 세미나에 참여하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여성문제를 접하고, 생각지 못했던 서로의 고민들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계여성학대회가 진행되는 기간 내내 딜레마에 빠졌다.
'여성학'대회 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적 요소들과, 세계여성학대회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전제들 때문이었다.

우선 19일(일)의 전야제 행사에서 보여주었던 “서울”에 관한 광고 영상물은 이 대회의 목적과 이념에 부적절했다. 물론 세계여성학대회의 주최국으로서 서울에 대한 정보제공은 필요했다. 하지만 그 영상물이 담고 있었던 내용은 무엇이었나.

빼곡히 들어선 건축물들과 서울을 가득 메운 자동차. 이들이 발전의 척도인양 드러내는 영상물 속에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외양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 녹아있는 서구 중심적인 성장 위주의 국가담론에 거부감을 느꼈다.

게다가 이성애 중심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마치 행복한 서울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양, 양손에 쇼핑백을 한가득 들고 회전문을 돌아 나오는 잘빠진 커리어우먼이 마치 서울에 사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인 양 이야기하는 그 영상물은 여성학대회의 취지와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23일(목) 열린 폐막제의 한복 패션쇼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설마 여성학대회에서 한복 패션쇼에 바비 인형들을 나오게 하지는 않겠지?’ 라며 친구들과 농담처럼 나눴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성의 상품화와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미’로 대표되는 늘씬한 모델들이 한복을 입고 무대로 등장했다.

물론 이 일은 많은 참가자들이 패션쇼 보기를 거부함으로써 사회자의 공개적인 사과를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으나, 주최측의 부주의함을 그대로 드러냈던 행사였다.

여성학대회의 주된 목적이 세계 각 나라 여성들의 ‘소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발표가 영어로 진행된 점 또한 문제였다. 참가자 모두가 영어를 듣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전제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최 측은 현장 등록을 못하게 함으로써 이 대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 모두 비싼 참가비를 낼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으며, 전일 참가 가능한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착각'했다.

아무리 영어가 세계 공용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또 주최측은 단지 관심 있는 몇 개의 세션을 듣기 위해서 25만원 정도의 비싼 참가비를 낼 수 없는 조건에 있는 여성들도 많다는 것, 참가자들(특히 활동가들)이 모두 아침 8시 30분부터 6시 까지 진행되는 학술대회 안에 묶여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아야 한다.
이러한 점들이 고려되지 않았던 이번 여성학대회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잔치였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주최 측은 모든 이화인이 ‘이화’에서 이 행사를 개최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여성학대회 개최로 인해 공간 권리에 대한 침해와 불편함에 대해 호소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과연 누구의 동의에 의해서 장소선정이 이루어졌는가. 주최 측은 장소를 선정할 때 과연 이러한 부분에 대해 한번쯤은 고민 해보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9차 세계여성학대회를 마친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이러한 전제들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홍혜미 (여성학과 석사과정 1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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