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tgers University 여성 글로벌 리더십 센터 설립자 Charlotte Bunch 인터뷰

여성 명예의 전당 회원이자 백악관의 '엘리너 루즈벨트 인권상' 수상자인 Charlotte Bunch (샬롯 번치)는 페미니즘 역사상 중요한 이름 중 하나이다. 그는 성인이 된 후 삶의 전부를 페미니즘 운동에 바쳤고, 사회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많은 상을 받았으며, 여성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여러 조직을 지휘하고 센터를 건립했다.

 그녀는 사회 인식이 강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작은 시골 마을의 의사였던 아버지는 원래 중국으로 선교 활동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대신 그는 미국 시골의 의사가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회 사업가였는데, 후에 뉴멕시코 최초의 지역사회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부모님에 대해  "부모님들은 시민운동가 그 이상이었다. 그들은 매우 정치적이지는 않았지만 사회적 의무에 대한 시민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계셨다" 고 말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활동은 1970년대 초에 시작됐다. 번치는 대학 기독교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인 학생 운동가에서 여성을 위한 국제 인권 운동의 주요 활동가로 변모했다.  그의 첫 번째 활동에는 인종주의에 대항한 투쟁도 포함되었다.  번치는 인종간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 일했고, 카프카스 백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했다. 또한 민권 운동을 위한 행진에 참석했고 베트남 전쟁을 막기 위한 집회에도 가담했다.

그 후 그는 페미니즘 분야로 활동의 반경을 옮겼다. 스스로 인정한 레즈비언이자 페미니스트로서 그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많은 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활동 분야를 레즈비언 페미니즘으로 한정짓지 않았다. 그는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로부터 국제적인 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의 여성 문제에 관해 강연해왔다.

번치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여성 인권 운동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그가 여성 인신매매에 대항하는 워크샵을 기획했던 1983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인신매매의 피해자들이 인권의 피해자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문제의 원인이 되는 여성으로만 취급되고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번치와 그의 동료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여성 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을 시작하게 되고, 이것이 '여성인권운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우리는 인권의 개념에 여성의 시각을 도입했다."며 "이것은 정말이지 페미니즘의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여성인권은 지금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번치는 여성인권운동이 국제적인 인권 체계나 유엔, 혹은 다른 조직들을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한 도구로 이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성 문제를 삶의 다른 영역에 어떻게 끌어올 수 있는가에 대해 보기를 제시한 셈이 된다"  그는 이것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임을 강조했다. "여성 문제나 페미니스트 운동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은 모든 문제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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