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아티스트 남경윤씨

 

<투오넬라>로 유명한 핀란드의 민족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가 민족적 색채가 강한 <핀란디아>를 작곡하게 된 데는 그의 세 번에 걸친 인생 전환점이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 통치 하의 핀란드에서 그는 핀란드어를 가르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 때 배운 핀란드 신화는 뒷날 시벨리우스의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두 번째 전환점은 핀란드 독립운동가의 딸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처가의 영향을 받아 민족적인 성향을 기를 수 있었으며, 신혼여행지였던 <카렐리아>지방에서 들었던 핀란드 민요는 그의 음악적 방향을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마지막 전환점은 그가 어린 시절 동안 해 오던 바이올린 연주를 그만두고 작곡을 하게 된 점이다. 그는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면 그의 기분이 잘 드러나 기복이 심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고 흥분을 해도 남에게 들키지 않는 작곡가가 됨으로써 그는 그의 성격을 보완할 수 있었다.

얀 시벨리우스는 이러한 전환점에 대해 “인생은 커다란 화강암이다. 자신이 얼마나 단단한 화강암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지’라는 정으로 화강암을 원하는 대로 조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시벨리우스처럼 자신의 인생을 전환한 사람이 있다. 지난 7일(토) 삼성역 백암아트홀에서 내한 공연을 갖고, 오는 11일(수) 우리 학교 음대에서 특강을 갖는 재미 재즈음악가 남경윤씨(27)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93년 서울 보성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그의 인생은 첫 번째 전환점을 맞는다. 그와 형의 교육을 위해 5년 동안 아버지는 서울에서 뒷바라지하는 등 부모님이 열성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영어도 잘 하지 못했고, 낯설기만 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 때 그의 외로움을 달래줬던 것은 이모가 선물한 키보드였다. 키보드는 유학생활의 적적함과 언어에 대한 장벽을 잊게 도와줬다.


입시준비에만 매달리는 한국의 고등학생들과는 달리,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과외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을 중시한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은 그의 과외활동을 돕기 위해 유명한 선생님들에게 키보드 레슨을 받게 해 줬다. 이는 단순한 취미생활을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그는 점차 음악의 매력 속으로 빠져들었다. 음악에 열광할 때는 하루에 14시간씩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오케스트라와 협연도 하고, 합창단 2개, 뮤지컬 클럽, 4중주 밴드, 락밴드 2개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이러한 활발한 과외활동을 인정받아 코넬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2학년 때 그는 학교 선배였던 중국계 미국인 더글러스 황의 재즈 공연을 보고 감동해 본격적으로 재즈의 길에 들어서기로 다짐한다. 또 한번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생긴 것이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의 반대는 예상보다 매우 심했다. 그는 ‘음악을 안 하느니 죽는 게 낫다’며 죽기살기로 버텼다. 부모 몰래 미국에서는 거의 하지 않는 음악학과(performance)로 전과를 감행하고 재즈밴드에도 가입했다.


‘부모 이기는 자식없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4학년이 되고 그의 재즈밴드가 학교 내에서 공연하는 등 호응을 얻자 부모님도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2002년 여름부터 미국 미시간, 오하이오주의 20개 도시 순회 공연을 열고, 35개 밴드와 협연을 하는 등 그의 인지도도 점점 높아졌다.


“저는 피아노를 어릴 때부터 치지도 않았고 단순히 음악이 좋아 제 인생을 바꾸기로 다짐했어요. 자기가 사랑하는 음악이라면 끝까지 믿고 열심히 해야죠. 밀고 나가면 결과는 다 나오게 돼 있습니다.”


2005년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의 초청으로 방한한 남경윤씨. 지난달 15일에는 그의 숨결이 담긴 음반이 국내에서 출시됐다. 그는 한국의 재즈 현황에 대해 “한국은 아직 재즈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즈를 하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이어서 너무 좋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는 곡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며 “재즈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기울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가 여러 전환점을 거치며 인생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자식을 믿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 준 부모님, 그리고 미국의 자유로운 학풍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움직인 가장 큰 에너지는 그의 ‘재즈 사랑’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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