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시네마떼끄 3월 마지막 주 기획 상영

 

 

2시

5시

십계1.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58m

십계2.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57m

휴관

십계3. 안식일을 지키라, 56m

십계4. 부모를 공경하라, 55m

십계5. 살인하지 말라, 57m

십계6. 간음하지 말라, 58m

십계7. 도적질 하지 말라, 53m

십계8.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55m

십계9.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58m

십계10. 네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 57m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110m

세 가지 색: 블루, 97m

세 가지 색: 화이트, 91m

세 가지 색: 레드, 99m

 

동유럽 영화의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1941년 6월 2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침공 하에서 보낸 그의 성장기는 유랑 생활과 다를 바 없었고, 아버지가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그의 가족은 요양소를 전전하며 생활해야 했다. 그는 군 입대를 피하기 위해 바르샤바 무대설치학교에 입학했고, 몇 년 후 수 차례의 재수 끝에 수많은 거장들이 거쳐 간 우츠 영화학교에 입학한다.
 
1960년대와 70년대 공산 정권이 지배하던 폴란드는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나라였다. 이로 인해 영화는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당에 의해 거부된 삶의 방식을 조심스럽고도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사회적 양심의 표현 수단이었다. 당시 다큐멘터리는 예술적 중요성과 함께 상업적으로도 극영화와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키에슬롭스키는 1966년 <사무실>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고 1978년까지는 다큐멘터리만 만들었다. 이 시기 그의 다큐멘터리는 상당히 정치적인 색채를 띠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 중 다수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1974년 제작을 기획한 <이력서>는 제명당할 위기에 놓인 한 공산당원의 반대 심문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허구였지만 그에 대한 당 통제 위원회의 결정은 있는 그대로였다. 영화의 기획은 상당한 논란과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키에슬롭스키가 영화를 통해 당을 희롱했다고 생각했다. 이후로 그의 여생 동안 자신의 조국, 즉 폴란드 대중들의 견해는 줄곧 엇갈리게 되었다. 한편에서는 그의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를 기회주의자요 자기 자신과 나라를 팔아먹은 배신자로 여기는 것이다.
 
1979년에 개봉한 극영화 <카메라 광>은 키에슬롭스키를 세계 영화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결혼과 직장 생활이 위태롭게 되도록 8밀리 카메라에 집착하는 한 공장 노동자에 관한 이 풍자극은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키에슬롭스키에게 국제적 명성을 안겨주었다.


또한 1988년 폴란드 국영 방송국으로부터 의뢰받아 만든 tv용 영화 <십계>는 영화계에서 그의 입지를 굳히게 해 주었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꼭 봐야하는 작품으로 말해진다. 그의 초기 작품들이 어떻게 외적 환경과 사건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다루었다면 십계 이후로는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보다 인물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더 집중하고 있다.


<십계>는 그 사이의 과도기적 작품인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원죄적 갈등을 탐구하는데, 주로 윤리적 충돌과 인간의 연약함을 관찰한다. 그 관찰은 노골적인 동시에 난해하다. 또한 그는 탁월한 솜씨로 고요하고도 시적인, 지울 수 없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는 이미지들을 만들면서 작품 속 배경인 바르샤바를 묘사하고 있다.


동유럽 전역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면서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자유 국가가 되었다.  키에슬롭스키는 프랑스에서 1991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를 완성하고 다시 한번 국제적 성공을 거둔다. 사실 그는 프랑스어를 단 한 마디도 할 줄 몰랐지만, ‘재정’과 ‘편집’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를 택했다. 특히 ‘감독이 직접 편집하는 것’은 키에슬롭스키에게 매우 중요했는데, 그래서 그는 ‘감독에게 편집의 자유가 없는’ 헐리웃을 거부했다. 1993년에 그는 프랑스 국기의 세 가지 색과 그 상징(자유, 평등, 박애)에 기초한 <세 가지 색: 3부작>을 기획한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상이 오늘날 어떻게 현실화되고 또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 궁금증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작품들로 그는 수많은 상을 받았지만, 최고의 정점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영화계를 떠나는 길을 택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진정으로 영화에 담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키에슬롭스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영혼일 것이다. 아니면 내 스스로가 발견해 보지 못한 진실이거나. 어쩌면 결코 잡을 수 없이 달아나 버리는 시간일 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그도 달아나는 시간을 잡지 못하고 1996년 심장 발작으로 5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3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했던 그이기에, 세상에는 그의 손으로 완성시킨 작품들이 많이 남아있다. 수급의 어려움으로 <십계>이후의 작품들만 상영하게 된 것이 안타깝지만 이번 주 상영하게 된 14편 모두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작품들일 것이다. 부디 영화를 보면서 그가 담고 싶어 했던 것들을 찾아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에겐 영화에 대한 뛰어난 재능 같은 건 없는 편이다. 예를 들어 오손 웰스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스물넷인가 여섯인가 하는 나이에 첫 작품으로 '시민 케인'을 만들고 영화 역사상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평생을 바쳐야 그런 위치에 다다를까 말까 한 형편이고 결국 그러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쉬지 않고 하는 것  뿐이다. 내 작품들은 더 뛰어난 것도 더 형편없는 것도 따로 없다. 모두가 한 걸음 씩 나아간다는 점에서 똑같고,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모든 영화가 다 내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목표를 향해 조금씩 접근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나는 재능을 충분히 타고 태어나질 못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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