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기자가 취재를 열심히 하면 맘껏 기사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기사’라는 것이 있다. 이런 기사는 아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로 2가지 개념으로 나뉘어 진다. 이제 이 개념의 정확한 정의를 그 예시와 함께 살펴보겠다.

첫번째는 쓰고 싶지만 섣불리 승낙할 수 없는 기사이다. 문화부 기자는 취재시 행사 홍보기사를 부탁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번은 연극 연출가와의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이 연극의 홍보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 연극의 각본을 맡으신 분이 이대 영문과 나오신 분이고, 학보사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나요?”라며 말이다.

다른 문화단체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부탁을 한다. “저희가 준비하는 프로그램에 이대생들이 많이 참여하고, 다음 행사를 이대에서 개최하려하는데 이걸 좀 기사에 써주실 순 없을까요?”

이런 부탁을 받다보면 많은 고민이 된다. 나도 기사로 쓰고 싶은 내용이지만 이미 다음 기획이 잡혀있고, 다른 기자와의 상의없이 내맘대로 정할 수 없는 셈이다. 결국 “고려해 보겠습니다” 또는 “죄송한데 싣지 못할 것 같네요”라고 정중히 거절할 수 밖에 없다.

두번째는 써야만 하는 내용이지만 취재원의 요청으로 내보낼 수 없는 기사이다. 취재하다보면 핵심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하는 취재원이 있기 마련이다. 여렵사리 알아낸 연락처로 어떤 회사 간부와 연결이 되자 묻고 싶은 질문을 쏟아냈다.

시원한 대답을 다 듣고나자 취재원이 “정말 부끄러워서 그러는데 제 이름이랑 대답한 내용은 안 실렸으면 좋겠네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좋은 대답을 해주고서 왜 싣지를 말라는 것인지 마음만 답답해질 뿐이다. 어떤 취재원은 인터뷰 후 “설마 이거 기사에 쓰는건 아니겠죠? 참고만 하세요”라며 오히려 나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사정사정을 하면서 간곡히 부탁을 해도 안된다고 딱잘라 말할 뿐이다.

어쩔 수 없이 취재원 요청으로 다음 주 신문에는 이름 대신 ‘담당자’ 혹은 ‘ㅊ씨’라고 표기되고, 일부 내용은 생략할 수 밖에 없다.

홍보기사를 부탁하는 사람들과 자기 이름을 밝히기 싫어하는 취재원들. 그분들은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기사’를 써야만 하는 기자의 고역을 알고는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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