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날 어떤시각] 하이델베르크에 두고 온 마음

2025-11-09     채의정 사진기자

 

7월24일, 나는 네덜란드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독일을 거쳐 동유럽을 여행하고 파리에서 귀국하는 한 달간의 배낭여행 시작이었다. 1학기 내내 오로지 출국만을 바라보며 바쁘디바쁜 일상을 버텨낼 수 있었지만, 막상 그날에 다다른 나의 마음은 그 시간들이 무색할만큼 혼란스러웠다.

1학기도, 계절학기 성적도 기대에 미치지 못해 아쉬웠다. 학보도, 다른 프로젝트들도 주어진 만큼 잘 해내지 못한 것 같아 속상했다. 그래서 방학 때라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 불안했다. 이런 상황을 초래해 놓고 한가로이 여행이나 떠나고 있는 나 자신이 미웠다. 이런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그 작은 좌석에 앉아 있는 10시간의 시간 동안 내 심장은 비행기가 가득 울릴 듯 쿵쾅댔다.

생각은 끝내 ‘이 여행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라는 이상한 욕심으로 이어졌다. 유명한 관광지는 다 가보고, 맛있는 건 전부 먹어보고, 동시에 동기부여를 얻어 2학기를 잘 살아내고 싶었다. 멋모른 욕심은 당연하지만 실망으로만 이어졌다. 여행이 조금이라도 뒤틀릴 때마다 마음속에 불안함이 쌓여갔다. 툭 건드리면 모든 게 무너져버릴 것 같은 불안함에 또다시 나에 대한 미움은 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와 처음으로 따로 다니기로 했다. 언니가 없자 숨기던 불안함과 우울함이 밀물처럼 밀려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래도 괜찮을까 싶은 걱정을 뒤로 하고 나는, 몇 시간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광장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여행에서 처음으로, 아니 고백하자면 올해가 되고 처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여행을 정말 잘 해내고 싶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성적을 받고 싶었고, 모든 프로젝트들을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었다. 나 자신이 정말 잘 됐으면 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이 결국 나를 슬프게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잘 해내고 싶었던 마음, 너무너무 잘 됐으면 하는 마음들이 되려 나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 모든 욕심의 근원지는 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이었다. 모든 미움의 근원지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그날 그렇게 여행의 목표를 완전히 바꿨다. 기념품 하나, 예쁜 사진 한 장 없어도 괜찮으니 그저 건강하게 잘 걷다가만 오기로. 인생이란 나 자신과 잘 지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느 날 또다시 욕심이 솟구쳐 불안해질지라도, “건강하게 잘 걷기만 해도 된다”고 스스로 말해 줄 수 있는 나를 기대하며. 그날 나는 이미 해가 져버린 벤치에서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