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재학생 문학상] 우수상 수필 수상작, '불공평한 인생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기'
불공평한 인생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기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 부조리함을 느끼고 고투해야만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본질적인 자세를 일깨우는 도전장이었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늘 삶의 의미를 갈구하지만 세상은 그 갈망에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는다. 그 속 깊은 틈, 바로 부조리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좌절에 빠질 수도,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오히려 그 숨 막히는 현실에 맞서며 자기만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 간다. 결국 중요한 건 불공평이나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내려 애쓰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불공평과 마주한다. 어떤 사람은 부족함 없이 풍족한 환경과 넉넉한 교육 안에서 출발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태생부터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어도 누군가는 집안의 든든한 뒷받침과 사교육의 도움으로 거침없이 나아가지만, 또 어떤 이는 밥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로 밤을 지새우며 공부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등록금을 모으려고 한 학기를 쉬어가야 하기도 한다. 이런 냉혹한 현실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카뮈의 말처럼, 우리는 불공정함을 정확히 바라보고, 거기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운다. 그 배움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점차 삶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나 역시 그러한 경험을 통해 불공평함을 배워왔다.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나는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과외는 나에게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각기 다른 학생들의 환경과 태도를 보며,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씩 달라졌다.
내가 상경한 이후 가르친 첫 번째 학생은 내가 속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삶을 보여주었다. 유명 배우가 산다는 유엔빌리지 고급 빌라, 내가 문 앞에서 서성이자 경계하며 나오는 젊은, 양복을 입은 경비원, 티브이에서만 보던 차가 여러 대 주차된 화려한 집, 준비할 필요도 없는 편안한 수업. 나는 예상보다 많은 과외비를 받으며 쉽게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동시에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을 느꼈다. 수능영어보다도 더 높은 시급을 받으면서도 집에 갈 때 택시 타라며 쥐어주던 3만원을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고 지하철역까지 한참을 걸어가던 내 모습에서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르쳤던 학생-정확히 말하면 학생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갈 미취학 아이—에게 나와 영어책을 읽고 공부하는 시간은 단순한 취미나 여가에 불과했다. 반면, 나에게는 생계를 위해 꼭 필요한 노동이었다. 두 사람의 삶이 같은 공간 안에서 교차했을 때, 나는 비로소 불평등이라는 거대한 현실을 피부로 느꼈다. 이 불평등은 나를 위축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카뮈의 말처럼, 부조리를 직시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은 저항하고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나에게 그 불편함은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나를 더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서울의 첫인상이 유달리 차가웠던 겨울이었다.
뒤이어 만난 또 다른 학생은 내게 염세적으로 변한 삶의 자세를 성찰할 기회를 주었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간호대학 입학을 준비하던 30대 여성인 내 학생은, 매일 병원에서의 근무를 이어가면서도 학업의 꿈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현실은 작지만 뼈아픈 차별로 가득했다. 간호사들만 사용 가능한 휴게실이라던가 탕비실의 간식 같은 사소한 영역에서조차 차별은 존재했지만, 그녀는 그 현실을 불평하기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 집중했다. 과거 공부하지 못했던 시간을 한탄하기보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신념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그녀에게 영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발판이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도구였다. 근무 있는 날 숙제하느라 힘들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힘들지 않아요, 얼마나 행복한데요.” 라고 답했다. 결국 그녀는 3지망으로 지원한 간호대학에 합격했고, 내년에 졸업을 앞두고 열심히 공부 중이라고 내게 종종 안부를 전해준다.
그녀의 말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행복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풍요 속에서도 불만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족함 속에서도 자기 삶을 사랑하고 행복을 찾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도덕적 교훈을 넘어 인간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진실이 아닐까. 우리는 환경에 의해 많은 부분이 결정되지만, 그 환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그 속에서 인간은 저항하고, 때로는 자기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아마 이것이야말로, 카뮈가 이야기한 부조리와 저항의 본질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같은 시간 동안 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내게 극과 극의 자극을 안겨주었다. 내 수업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여유로운 취미에 불과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꾸기 위한 간절한 발판이 되었다. 이처럼 상반된 현실은, 결국 나 자신에게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한때 나태함에 젖고 현실에 안주하던 나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경쟁심에 불이 붙었고, 염세적인 내 시선도 조금씩 긍정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깨달음이 있다. 나를 진짜 성장시키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라, 그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나’라는 사실이다.
아직 살아온 햇수로는 스물세 해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도 수많은 경험을 겪으며 나는 계속 성찰하고 성장할 것이다. 때로는 불공평함 앞에 좌절할지도 모르고, 예상치 못했던 기회에 감사를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나 자신을 믿고 한 걸음 더 내딛으려 한다는 점이다.
카뮈가 고대 신화 속 시지프스를 ‘행복한 인간’으로 그려낸 것도, 어쩌면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끝없는 돌덩이 굴리기라는 불합리 속에서도 시지프스는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나 역시 마냥 현실을 탓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나만의 의미와 성장을 발견하고 싶다.
인생은 처음부터 불공평하게 시작되고, 그 불공평은 오랜 시간 이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불공평하다’라는 말 자체가 무색해질 날이 오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나는 더 이상 “왜 나는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했는가?”를 묻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그 불공평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성장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한 걸음 더 성장한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