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재학생 문학상] 최우수상 수필 수상작, '다시 만난 쥬라기'
다시 만난 쥬라기
쥬라기월드의 새로운 시리즈가 개봉했다. 단언컨대 내가 인생에서 제일 많이 본 영화 시리즈인 쥬라기월드의 새로운 이야기는 예전만큼 내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이제 인간이 만들어 내는 공룡의 상상력에 한계가 보이는 느낌이었달까. 아니면 한계를 보이는 건 나의 동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작년 이맘때 갔던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을 기억한다. 전날 페스티벌에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떠난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세계 공룡의 날을 맞아 특집 공룡 행사가 열렸기 때문이다. 공룡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역사가 꽤 길지만, 그 깊이는 접시물 만큼도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서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여전히 나에게도 무언가를 오래도록 좋아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다는 증거를 직접 보고 싶었다.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이 가능하기를 바랐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입구부터 반기는 조잡스러운 거대 공룡 풍선만으로도 내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가운데 다 큰 어른이 혼자서 그사이를 저벅저벅 걸어 다녔다. 부끄러움도 잊고 아이처럼 신났다. 이렇게나 간단히 행복해질 수 있는데 이제껏 잊고 살아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주 오랫동안 육지에서 살아왔던 물고기가 처음 비를 맞은 기분이었다. 특히나 잊히지 않는 것은 자연사관에서 만난 거대한 실물 공룡 뼈다귀보다, 입구에서 안내하시던 할아버지의 눈빛이었다. 혼자서 화석을 기웃대니, 설명해 주고 싶어 하시는 게 느껴지는 그 조명보다 반짝이던 눈빛. 그 어떤 고고학자보다 공룡에 대해 박학다식하다던 유치원생이 해주는 설명만큼이나 유창한 설명이었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오랫동안 잃어버려왔을까. 적어도 그 안내원 할아버지는 당신의 기나긴 생 동안 단 하나만큼은 지켜내신 듯했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현대 자본을 쏟아부어 탄생한 불끈불끈하고 생동감 넘치는 공룡 영화를 보면서도 6천만 년 전 멸종이 내게 다시금 임박한 것 같았다. 드디어 온 마음을 다해 공룡들이 더는 없다는 걸 어른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살점 하나 없는, 거칠고 거대할 뿐인 공룡 화석들을 보자마자, 그 파충류들은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픽사의 영화인 <유령 신부>에서 피골이 상접한 산 사람들보다 죽은 자들의 나라에서 덜그럭거리는 해골들이 훨씬 인간미 넘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가끔 상상력 자체가 생명력이 되는 경우가 있다. 내 머릿속에서만 살아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천천히 21세기 대한민국 대전광역시에서 다시 만난 쥬라기 속 원시림을 거닐며 공룡들을 만났다.
가장 먼저 발견한 티라노사우루스, 이제는 인류 하면 호모사피엔스이듯이 공룡 하면 티라노사우루스이지 않을까. 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린 티라노사우루스는 모두 다른 모습일 것이다. 내 상상 속 티라노사우루스는 어렸을 때의 그것보다는 많이 작아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마주했던 화석은 내 머리 용량을 초과하는 크기였다. 그 이빨 한 개는 내 팔뚝만 했고, 전체 머리뼈 크기는 학교 칠판의 3분의 1보다 컸다. 조립된 전체 화석은 아득히 고개를 뒤로 꺾어야 했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표현은 오로지 이 공룡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왜 이 화석을 처음 봤을 때 거대한 도마뱀이라는 뜻의 Tyrano Saurus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사람들은 온갖 멋있는 특징을 함께 붙여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과학이 계속 발달하면서 티라노사우루스는 초기의 예상 이미지와는 다르게 털도 몇 개 삐죽삐죽 나있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뚱뚱하고, 앞다리는 거의 없다 싶은 귀여운 수준이고, 멋있게 울부짖기는커녕 울음소리는 낮은 주파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동물의 근육조직은 모두 분해된다. 그래서 훗날 고슴도치 화석이 발견되었을 때, 이 동물에게 가시가 있었다는 걸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진실은 아킬레우스의 수처럼 가까워져도 영원히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불가능이 인간의 상상력에 무한한 가능성을 불어넣는다. 만약 과거 여행을 해서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습을 확인할 기회를 준다고 해도, 나는 가고 싶지 않다. 계속해서 모습이 바뀌는 그 특징마저 내가 사랑하는 티라노사우루스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만난 공룡은 엘라스모사우루스였다. 이 공룡은 상대적으로 이름이 생소한데, 내가 이 공룡의 이름을 처음 봤던 건 어떤 라디오 방송에 관한 사연에서였다. 한 어린이가 사연에서 자신이 목이 짧은 게 콤플렉스라고 털어놓았다. 어린이가 벌써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져서 안타까웠는데, 알고 보니 자신은 공룡만큼 목이 길어지고 싶은데 그게 아니라 고민이라는 귀엽고도 웃긴 고민이었다. 나는 브라키오사우루스정도를 떠올렸는데, 사람들의 반응 중에 엘라스모사우루스라는 처음 들어보는 공룡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사람과 기린의 목뼈는 7개로 동일하다. 그러나 엘라스모사우루스는 목뼈 개수가 무려 75개, 목길이는 8m에 달하는 거대 수장룡이다. 양옆 날개같이 생긴 지느러미로 물을 휘저어 헤엄쳤으며, 물고기나 암모나이트, 심지어 수면 위로 목을 빼서 익룡도 잡아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어린이는 언제 자신이 엘라스모사우루스가 될 수 없단 걸 깨닫게 될까, 누군가 알려줘야 할까 싶다가도 염세적인 나의 시선에 반성하게 되었다. 나도 한때는 포크레인이, 나의 언니는 충치균이 되고 싶어 했던 꿈 많은 꼬마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 전시 무대를 한 바퀴 휘감은 엘라스모사우루스의 화석을 보며 그가 멋지게 헤엄쳤을 태초의 바다를 상상하니, 그런 꿈을 가지게 되는 건 응당 합리적인 수순으로 느껴진다.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 해도 상관없다. 그것을 깨달을 때도 많이 아프지 않다. 어떤 꿈은, 이상은, 그런 무용하고 빛나는 것을 한 시절 품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이뤄져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파키케팔로사우루스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룡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에는 공룡 울음소리를 내며 엄마 아빠한테 매일 박치기를 했을 정도다. 이유는 하나다. 바보 같기 때문이다. 뭔가 모자라 보이는 애들한테는 그냥 마음이 간다. 파키케팔로사우루스는 박치기 공룡으로도 유명한데, 실제로는 초식공룡이고, 박치기보다는 도망을 더 잘 쳤으며, 머리뼈는 완충 효과를 하기 위해 그다지 튼튼하지도 않다. 알면 알수록 허술한 매력이 있는 친구인데, 그런 점에서 동경의 대상이 되기 쉬운 다른 공룡보다도 더 정감이 간다. 때로는 박치기할 수 있어도, 박치기보다는 도망이 최선의 공격이라는 걸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초식공룡이어도, 묵직한 한방을 언제나 머리 위에 얹고 다녀야 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티라노사우루스나 벨로시랩터처럼 어마무시하고 강한 공룡들보다는 꿋꿋이 풀 먹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파키케팔로사우루스를 응원해 주고 싶었다. 그런 소시민적 행보가 대부분의 우리네 모습과 닮아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 내가 자연사 박물관에 가기만 하면 공룡 전시를 피해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뒤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나의 기억과는 어긋나는 진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말씀에서 나는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질끈 감고 울거나 도망가 버리는 나의 언니와는 다르게, 엄마 손을 꼭 잡고서라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공룡을 뚫어져라 쳐다봤다고 말씀하셨다. 무서우면 그만 보면 될 것을, 마치 이겨 먹으려고 하듯이 엄마를 방패 삼아 슬금슬금 전진하던 게 귀여웠다며 웃으셨다. 나는 이제 학점을 챙기고 취업을 준비하며 스펙을 쌓느니 차라리 공룡과 맞서 싸우거나, 랩터 무리에 껴서 사냥을 함께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한 선택지인 어른이 되었다. 박물관의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공룡들의 생생한 포효는 어느새 아득해지고, 갓 태어난 원숭이 같던 인류가 이렇게나 어엿하게 자라, 지구를 착취하며 성실하게 진화해 달에서 가져온 돌덩이를 마주하며 전시는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종한 생물들은 언제라도 다시 나타나 언제 그랬냐는 듯 멋지게 지구의 주인이 되어있을 것만 같다. 익룡 중 가장 크고 무거웠던 케찰코아틀루스가 하늘을 활공하며 해를 가리고,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 둔 화분은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먹이가 되고, 향유고래와 모사사우루스가 함께 헤엄치는 그림자를 살아생전 보고 싶어진다. 지구의 주인이라며 오만을 떨고, 생명을 멋대로 해치는 인간들과 한 판 제대로 붙어 지구의 복수를 대신해 줄 그 파충류의 시대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그렇게 지구가 다시 평평해질 날만을 기다린다. 여전히 공룡들이 주는 환상을 사랑한다. 지금은 분명히 없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있었던 것들. 그리고 언젠가는 분명히 다시 있을 것들. 언젠가를 기다리며 자취를 쫓아다니며 다양한 형태로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룡박람회 수기 전시 중 이런 문장을 써준 공룡 열혈 팬이 있었다.
“이 세상에 없어 실체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심지어 그 이미지마저도 공방의 여지가 있는 존재가 이렇게 우리를 한데 모아줄 수 있다니, 좋아하는 힘이 세상에 많은 일들을 만들어냅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변한다. 좋아하는 객체도 변하고, 좋아하는 주체도 변한다. 파도와 시간이 합작해서 모난 돌을 결국은 모래로 깎아내듯이, 그렇게 변한다. 나는 그렇게 휩쓸려가 버리는 내 마음과 바친 시간, 그 모든 걸 부정당하는 느낌에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러나 공룡은 나에게 누군가의 마음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삶의 형태를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바로 화석이다. 생물은 썩어버리기 전에 빠르게 퇴적 환경에 매몰된다. 이 상태에서 장기간 퇴적물이 쌓이고, 압력을 받으며 암석으로 변한다. 물렁물렁한 유기물 부분은 사라지고, 단단한 이빨과 뼈만이 남는다. 그 틈새로 지하수의 광물질이 스며들어 원래 조직을 대체하거나 틈을 채운다. 공룡에 대한 나의 애정과 열정 또한 이처럼 화석이 되었다. 어렸을 때 생생히 내 맘을 뛰놀던 공룡이 죽고, 그 위에는 더 좋아하는 것들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북이 쌓여 공룡을 덮었다. 아이돌, 친구, 애니메이션 캐릭터, 폴라로이드 카메라 같은 것들. 그런 것들에 짓눌려 공룡은 암석으로 굳어버렸다. 나는 그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버렸기 때문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려서, 파도가 휩쓸어 간 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동안 뼈다귀의 틈새에는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경험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공룡을 좋아했던 어린 날의 이유 같은 건 사라져 버렸지만, 그때의 내가 공룡을 보던 시선-온 세상이 너무나도 커 보이던 그때의 동경-들만이 단단하게 남아 화석이 되었다. 그리고 파도가 그 위를 덮고 있던, 좋아했던 것들의 파편을 쓸어내고 가져가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다시 공룡을 마주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파내어 귀를 대본다. 소라고둥 속처럼 아름다운 철썩임과 바다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아니다. 귀가 찢어질 듯한 포효와 진흙을 철벅이는 발자국 소리, 풀숲 사이를 바스락거리며 이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웃음이 나온다. 가슴 깊은 곳에서 좋아하는 힘이 솟아오른다. 두고 왔던 모든 것이 결국은 전부 여기, 내 마음 속에 있었다는 걸, 공룡은 다시는 잊지 말라며 내게 건네고는 홀연히 쿵쿵 사라져 버린다. 언제라도 내게 다시 와주길, 나의 차갑고 초라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멋지게 한 방 먹여줄 그 원시적이고 투박한 기개를 다시금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