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시와 노래로 드러난 한국 문화, 서구와의 첫 만남

2025-09-28     김승우 국어국문학과 교수

 

19세기 말은 한국이 본격적으로 서구와 조우하던 시기였다. 개항 이후 한국을 방문한 서구인들은 풍물과 풍속, 제도와 사회 구조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에 스며있던 노래와 시에도 눈길을 줬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단순히 민속학적 호기심으로만 접근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적 깊이를 진지하게 파악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기록은 한국 시가(詩歌)의 의미와 가치를 당대의 세계적 지평 속에서 어떻게 조망했는지를 보여 준다.

우선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문헌에 정착된 시조(時調)를 영어로 번역해 처음 서구에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1895년 잡지 ‘한국휘보’(The Korean Repository)에 시조를 옮겨 실었는데, 원작의 의미는 그대로 보존하되 영시의 운율과 형식을 적용했다. 시조의 초·중·종장을 각각 두 행씩 압운을 맞추는 방식으로 번역해 시적 완결성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비록 그가 시조를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지만, 한국에도 중국의 한시나 일본의 와카(和歌)에 상당하는 고유한 서정시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구에 알린 점은 분명 의미 있는 성과였다. 그러나 점차 게일은 한국문학의 본령을 한문학에서 찾으려 했고, 한국이 중국의 전범을 모방함으로써 문화적 성취를 이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이에 비해 동시대의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완연히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는 시조의 연행 현장을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의 시와 노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짧은 시가 형식 속에 서사적 맥락과 정서적 깊이가 충분히 담겨 있다고 봤다. 때문에 시조를 ‘3막으로 구성된 연극’에 비유하는가 하면, 원작보다 훨씬 긴 의역을 제시해 서구 독자들이 보다 친숙하게 한국시가의 면면에 공감하도록 이끌었다. 더 나아가 헐버트는 판소리나 ‘아리랑’ 등 구비문학 자료에 주목하면서 중국의 영향 속에서도 한국적 요소가 뚜렷하게 살아 있음을 강조했다.

당시 두 사람은 격렬한 지상(誌上)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게일은 한국이 중국문학에 철저히 종속됐다고 주장했지만, 헐버트는 영국문학이 유럽 대륙의 자장권 속에서도 독자성을 유지했던 것처럼, 한국문학 역시 외래 요소를 수용하면서 나름의 고유한 전통을 발전시켰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한국문학에 대한 서구인의 시각이 결코 단일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한편 프랑스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방대한 분량의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를 편찬하면서 한국 시와 노래의 존재 양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시조, 가사, 민요 등이 필사본이나 구전으로 널리 향유된다는 사실을 기록하며, 한국인의 삶 속에서 시와 노래가 차지하는 위상에 주목했다. 비록 중국적 표현과 차용이 곳곳에 섞여 있다고 봤지만, 그는 구체적인 서지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국시가의 자료적 토대를 밝혀냈다는 점에서 이전 선교사들과는 다른 학술적 면모를 보여 줬다.

반대로 프랑스 시인 조르주 뒤크로(Georges Ducrocq)는 보다 감각적인 시각에서 한국의 노래를 소개했다. 그는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작품의 흐름과 서사적 맥락을 고려해 시가를 번역하고 때로는 재창작함으로써, 한국인의 삶과 인식이 노래를 통해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학술적 엄밀성보다는 예술적 감수성을 앞세웠지만, 오히려 그것이 한국 시와 노래의 정서를 서구 독자에게 전달하는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었다.

쿠랑이 서지적 증거를 통해 한국시가의 존재와 분포를 객관적으로 드러냈다면, 뒤크로는 창작적 직관을 통해 한국인의 일상과 정서를 인상적으로 전달했다. 학문적 체계성과 문학적 감각이라는 두 축은 당시 프랑스 지성계가 한국문학의 특질을 이해해 나가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처럼 19세기 말 서구인들의 한국시가 인식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하나는 게일과 쿠랑처럼 문헌을 탐색하며 학술적 연구를 지향한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헐버트와 뒤크로처럼 연행 현장과 감각적 체험을 중시한 부류이다. 두 흐름은 서로 길항하면서도 보완적인 관계를 이뤄, 한국의 시와 노래를 세계문학의 지평 속에 처음으로 위치 지었다.

오늘 우리가 이들의 기록에 다시 주목하는 까닭은 단순히 서구인의 시각을 복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남긴 번역과 논평에는 한국시가를 바라보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그것은 지금 우리가 세계에 한국의 시와 노래를 어떻게 선보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한국시가의 독창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사유하려는 시도는 19세기 말에도 있었고, 바로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요청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의 기록은 시와 노래에 국한되지 않는다. 19세기 서구인들은 한국의 복식과 음식, 의례와 종교, 교육과 놀이까지 두루 관찰하며 기록을 남겼다. 낯선 외부인의 눈으로 본 우리의 삶은 때로 과장되고 오해됐지만, 동시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문화적 자산의 가치를 드러내 주기도 했다. 노래 한 곡, 짧은 시조 한 수가 한국인의 사유와 정서를 보여 줬다면, 한 벌의 옷차림이나 한 그릇의 음식, 제사의 절차나 거리의 풍경은 한국문화 전체의 결을 드러내는 단서가 됐다.

분명한 것은, 이들에게 한국문화 전반이 결코 먼 변방의 지역적 풍속에 그치지 않고,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로서 기능했다는 사실이다. 19세기 말 서구인의 기록이 그 가능성을 처음 비췄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 유산을 ‘K-컬처’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확장하고 있다. 한강의 소설이 세계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 것도, K-팝과 드라마가 전 지구적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결국 한국적 삶과 정서를 보편적 언어로 번역해 낸 결과였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국문화가 지닌 농축된 힘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려, 세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공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