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록탑] 종이와 스크롤을 오가며
어렸을 때부터 늘 글과 가까운 일을 하고 싶었다. 시작은 아무래도 읽고 싶은 마음이었다. 가장 오래된 친구에게 첫인상을 물으면 책벌레라는 답이 돌아올 정도로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했다. 요즘은 이북(E-book)이 편리하다고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책을 선호한다. 물성이 있는 글이 마음에 더욱 오래 남기 마련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소 고집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어쩌면 내가 글을 놓지 못하는 이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피곤해도 활자로 생각을 쏟아내야만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은 날들이 있다. 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일의 내가 피로할 것을 알면서도, 주황빛 표지의 일기장이며 미색의 메모장을 놓고 싶지 않다. 사적인 글을 쓰다 보니 남에게 보일 글도 쓰고 싶어졌다. 아주 사적이거나 공적인 글을 쓰고 싶어 블로그를 시작하고 교지 편집부에 지원하던 열일곱은 여전히 나름의 방식으로 글을 좇는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와 마주한 것은, 의외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SNS 계정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마케팅 부서만 골라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학기가 쌓이며 나름의 직책들을 가지게 됐다. 의도치 않게 팔로워가 수천 명에 이르는 공식 계정을 두 번이나 다루며 SNS라는 가상의 공간을 일터로 맞이했다. 여태껏 써 오던 글에 비해 확연히 짧은 문장, 몇 장의 이미지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먼저 하게 된 것이다.
SNS는 매력적이면서도 무서운 공간이다. 누군가의 일상은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사이에 스쳐 지나가고, 3:4 비율의 이미지나 박스 형태의 링크도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쉽게 묻혀버린다. 한때는 기록이라고 불리던 것들도 어느 순간 자취 없는 흔적이 된다. 특히 인스타그램은 변색되지 않는 고화질의 앨범이자 언제든 영구히 삭제할 수 있는 휴지통 폴더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글이 남기려는 것이라면, SNS는 지워짐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남기고 싶음’과 ‘잊히고 싶음’ 사이를 오가며 스크롤 위에 잔재한다.
이러한 인스타그램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명명한 ‘액체 근대’의 상징과도 같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흐르고 사라지는 시대에, 화면을 들여다보는 개인은 스스로를 지키면서도 원하는 것을 찾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프레임을 구성하는 ‘액체적인 것’들은 결코 쉽게 잡히지 않는다. 대신, 종이에 남는 글은 그 흐름 속에서 드물게 ‘고체적인 것’으로 남는다. 고체적인 것을 액체적인 시대에 녹여 내는 것이라 생각하면 매주 하는 일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대학보 SNS 계정을 운영하며 이를 더욱 뚜렷하게 실감했다. 우리는 매주 발행되는 기사를 줄이고 줄여 열 장 남짓한 이미지에 담음으로써 수천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와 소통하려 애쓴다. 이번 학기 부장을 맡은 후로는 11년간 멈춰 있던 X(구 트위터) 계정의 먼지를 털고 그 운영을 맡고 있다. 팔로워들의 코멘트를 보다 직접적으로 마주함으로써 우려되는 점도 많았으나 그 파급력도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실제로 X에서 한 번 주목을 받은 기사의 조회수가 만 회를 훌쩍 넘기는 일도 있었다.
또 매주 신문을 내는 데에 손을 보태며, SNS 속 눈 모양 그림과 함께 새겨지는 숫자가 몇이든 결국 본질은 ‘글’에 있다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는다. 스크롤 한 번이면 사라지는 피드와 달리, 종이에 인쇄된 글은 기록 속에 남는다. 글이 쓰이고 고쳐지는 순간, 읽히는 순간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당연하게 존재한다. 여러 SNS 플랫폼 속 일렁이는 반응의 파도 속에서, 글은 여전히 파도 아래의 바위처럼 자리를 지킨다. 사라지는 기록에 익숙한 세대이기에 더 단단하게 남는 글이 필요하다. 이를 핑계로 삼다 보면 글을 보는 일을 하면서도 글을 읽는 공부가 좋고, 애정해 온 글로 도피할 수 있음이 아직은 즐겁다.
쉽게 만족하지 못하고 하고 싶은 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지난 여름에는 원래의 역할을 벗어나 취재 교육을 듣고 직접 기사를 작성해 보기도 했다. 그 시작과 끝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지금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글과 이미지를 동시에 다루는 자리에 서 있다. 사라지는 기록과 남는 기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이 요즘의 최대 목표 중 하나다.
앞으로도 나는 글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신문이든 소설이든, 종이를 넘기는 것이 차선이자 사치스러운 여유가 아니라 일상으로 남았으면 한다. 그렇게 모이는 글은 언제나, 분명히, 각자의 소리로 입을 열 준비를 하고 마음속에 남기 마련이다. 서점의 향을 담은 향수도 상품으로 나오는 세상이다. 오랫동안 글을 읽고, 쓰고, 들으며 그 향을 맡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