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편집국] 보기를 원하는 세상 앞에서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이대학보입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지난 주, 마치 가을 우기가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듯 세찬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비에 정신없이 우산을 챙기고 발걸음을 서두르며 한 주를 보낸 우리 모습처럼 사회도 쉴 틈 없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제 성평등이 상당히 실현됐다고 말합니다. 여성의 교육 기회가 넓어지고 사회 진출이 활발해졌으며 법과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표면적 성과가 곧 완전한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에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는 여성이 오히려 차별을 조장한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을까요?
지난 학기 이대학보는 계명대학교 여성학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사건을 다뤘습니다. 여성학은 오랜 시간 성평등 담론의 이론적 토대로 기능했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왔습니다. 그러나 대학은 학문적 가치보다는 당장의 학생 모집과 재정 문제를 앞세워 여성학과를 폐지했습니다. “이제는 필요 없다”는 식의 태도는 곧 성평등 의제를 주변부로 밀어내고, 여성학을 시대적 소임을 다한 과거로만 바라보게 합니다. 같은 흐름 속에서 지난해에는 동덕여대가 남녀공학 전환을 추진하려는 시도를 보였습니다. 여성 고등교육의 장으로서 지녀온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 경쟁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라는 설명이 뒤따랐지만, 그 결정은 ‘여자대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려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학기, 우리는 또 다른 현장을 마주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포항공대에서 총여학생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학내 여학생들의 권리를 대변하고 목소리를 낼 유일한 창구가 사라지는 순간 사회는 그것을 당연한 변화인 듯 받아들이려 합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가 메워지지 않은 채 남겨질 때 우리는 그 공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사건을 통해 학문과 제도는 여전히 거꾸로 흐르고 있음을 우리는 또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보기를 원하는 세상은 여전히 여성에게 존재를 증명하고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숙제를 안깁니다.
“이제는 다 나아졌잖아. 뭘 더 원해?”라는 질문을 누군가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음은 현실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던져진 질문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는 차별과 불평등의 지표가 남아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 중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의 현실, 특정 종파에서 목회자를 ‘사람’이 아니라 ‘남자’로 한정하려는 시도, 성별에 따른 유리 천장을 당연시하는 조직문화는 차별이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줍니다.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며 차별을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크고, 그 목소리에 눌려 침묵을 강요당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화의 역사는 바로 이 질문들 앞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미 충분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고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는 무관심에 맞서 우리는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그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멈추지 않는 힘이 필요합니다. 권리를 향한 싸움은 잠시 주춤하면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진정한 성평등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도적 개선뿐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졌다고 말하기 전에 더 나아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끝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여성들이 여전히 숨죽이며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사회라면 우리는 결코 완전한 평등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대학보는 앞으로도 학내와 사회 곳곳에서 외면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학생 사회의 권리를 회복하는 데 힘쓸 것입니다. 불평등의 현장을 기록하고 침묵 속에 묻히려는 목소리를 드러내며 잊히려는 역사를 다시 불러내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갈 것입니다.
1715호를 끝으로 학보는 한 달간의 휴간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더 단단히 준비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학교 구석구석을 더 깊이 살피고 사회 현장을 더 넓게 돌아다니며 다시 독자 여러분 앞에 설 기사를 다듬겠습니다.
보기를 원하는 세상 앞에서 제 목소리 내지 못하는 여성의 권리에 숨을 불어넣고자 합니다. 멈추지 않고 쓰겠습니다. 꺾이지 않고 기록하겠습니다. 그것이 이대학보의 책무이며,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