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주연 시인, “첨예하고 정제된 언어”로 세상을 기록하다
그저 문학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던 시인 봉주연(국문·19년졸)씨는 시 합평 모임에서 습작 ‘여우의 귓바퀴’를 낭독하던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때의 고요함은 봉씨에게 특별하게 남아있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요. 제가 쓴 시를 읽은 순간, 분위기가 싹 가라앉던 그때가.” 이때의 기억은 시를 쓰는 원동력이다.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2025) 출간을 맞아 이불처럼 포근한 미소를 가진 봉씨를 만났다.
시는 봉씨의 일상 한 부분을 온전히 차지한다. 동아일보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하루에 시를 쓰는 시간을 비워두는 편”이다. 그에게 시 쓰기란 한순간의 영감이 아니라, 일종의 업무이기 때문이다. 다만 갑자기 일상에서 어떤 균열이 발생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놓치지 않고 문장을 만드는 편이다. 가령 “출근할 때 까먹은 지갑을 부랴부랴 챙기고 지각하는 것, 여행을 가는 것, 사랑에 빠지는 순간들이 그렇다”고 말했다.
평범한 하루에서 길어 올린 문장들
현실적인 글을 쓰는 편집기자와 창의적인 글을 쓰는 시인의 언어는 다른 것으로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그에게는 두 분야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편집기자 일도, 시를 쓰는 일도 첨예하고 정제된 언어를 사용하고 글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계속 깨워야 하는 일”이라며, 오히려 퇴근 후 사고가 날카롭게 열려있어 시가 더 잘 써진다고 말했다. 기사와 시는 불특정 다수에게 닿을 것을 염두하고 작성한다는 공통점도 있다며 “두 가지 다 굉장히 사교적인 분야”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자 봉주연과 시인 봉주연을 두고 “둘 다 나의 메인 캐릭터”라며 작게 웃음 지었다
기자로 일하며 느낀 바가 시로 스며들기도 했다. 봉씨는 2023년 7월15일 충북 오송에서 폭우로 지하 차도가 침수됐을 당시 느꼈던 감정을 에세이로 작성했다. 그는 TV 속보와 새로운 기사가 올라왔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며, 사상자 숫자만 비워둔 기사 제목 속 공백에 무력감을 느꼈다. 일상 속 반복되는 사건과 허탈함에 익숙해지고, 퇴근하며 문득 “오늘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봉씨는 “영혼의 한 조각이 사라진 느낌”을 받았고, 깨져버린 내면의 파편을 다시 찾기 위해 시를 쓰게 됐다.
그의 시집 ‘우리는 모두 이불에서 태어난걸요’(2025)에도 비슷한 경험이 담겨 있다. 시 ‘[1보][9보][12보]’는 5월13일 발생한 이천 물류창고 화재 취재를 바탕으로 썼다. 한 기자가 사망자 수를 취재부장에게 보고할 때 “서른여덟입니다”가 아닌 “서른여덟 같습니다”라고 말해 부장이 화를 냈다는 상황에서 영감을 얻었다. 봉씨는 이 상황을 ‘서른여덟이란 결말에 다다르기 직전까지 한 번이라도 그 비극에 망설여본 사람이라면 말끝을 흐릴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기자로서 목격한 고통과 무력감이 시 속에 섬세하게 깃든 순간이었다
성숙의 과정에서도 않는 재미
봉씨는 두 권의 시집을 펴내며 시와 함께 성장했다. 등단하기 전, 대학에서 글을 쓰고 투고하던 시절에는 마냥 행복하게 시를 썼다. 온전한 나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해방감을 느끼게 했고, 이는 하루에 2~3시간씩 시를 쓸 수 있는 동력이었다. 계약금을 받은 후부터 시 쓰는 일은 업무처럼 느껴지지만, 아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봉씨는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 같다며 “반짝반짝했던 시절은 이제 졸업시켰고 (지금은) 다른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약을 준비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시 쓰기 제1 원칙은 ‘재미’다. 중압감을 가지고 시를 쓰긴 하지만, 매일매일 재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봉씨는 “너무 울고 싶을 때 울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슬플 때 시를 쓰고 나면 후련해진다”고 시 쓰기의 즐거움을 설명했다. 그는 “시가 감정의 배출구면 어떠냐”며 시 쓰기에 재미를 느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봉씨는 시를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미술관에 갈 때처럼 어떤 의미를 해석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색채나 구도 등 자신의 오감을 활용해 그냥 감각하면 좋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