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연(緣)] 삶은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하는 여정

2025-09-21     황미애 서서울생활과학고교사
황미애(외국어교육·96년졸) 서서울생활과학고 교사

생각과 고민이 많은 이화인.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며 좌충우돌 살아가지만, 은혜 속에서 감사함을 배워간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기에, 서로를 보듬고 하루를 정직하고 지혜롭게 걸어갈 때 작은 빛을 비출 수 있다고 믿는다.

어느 초여름 밤 바닷가에서 삶의 고독과 고뇌를 느끼며 중년이 된 나는 차 안에 앉아 폭죽을 터뜨리는 10대들의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황하는 갱년기 교사가 사춘기 학생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을 감상하는 묘하고 웃픈 상황 속에서, 삶의 가치는 대단한 변화와 성취보다는 그저 서로 알게 모르게 작은 위로와 격려를 전하며 함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선배의 칼럼 원고 요청을 받고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이화여대에 입학했던 설레고 부푼 마음이 여전한 지금, 벌써 오십 대 중년이 된 모습이 스스로도 어색하고 내 삶은 모범이 되기보다 좌절과 연약함의 연속이다.

어른이 되고 싶었던 10대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이화여대에 입학하며 성취감과 기대감을 안았다.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고 싶었으나 잘되지 않았고, 졸업 후 사회인이 되기 전에는 두려움과 부담이 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길을 찾은 듯했지만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이대를 출발해 걷고 또 걸어 높은 빌딩 숲을 바라보며 광화문을 지나 밤이 되도록 걸었던 기억도 있다. 그래도 첫 직장을 구해 열심히 일했으나 오래지 않아 한계에 다다라 퇴사했고, 아시아의 한 국가로 첫 해외 봉사 활동을 떠났다. 두 달여간 선교센터에서 지내다 무사히 돌아왔고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한동안 몸과 마음이 공황 상태에 빠져 힘든 시간을 보내다 다시 취업해 출판사에서 일하며 20대 중후반을 보냈다. 이 기간 친구들은 결혼했으나 나는 진로 고민이 깊었고, 30대 초반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강사를 시작으로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담임 교사도 맡았다. 30대 중반에는 결혼하고 자녀도 출산하며 어렵사리 인생의 과제를 이루었다. 그러나 20~40대의 수많은 고민과 어려움은 치열했다.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고 때로는 눈물과 불면의 밤으로 허우적대며 동아줄 하나에 겨우 매달리거나 망망대해 홀로 있거나, 배가 좌초되거나 내일 태양이 도저히 뜨지 않을 것만 같은 날들도 있었다. 인내의 한계가 끝없이 내려갈 때도 있었고, 더 이상은 나아가지 못해 주저앉은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도저히 답도 길도 없는 절망의 순간마다 생각지 못한 작은 빛이 비추곤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화를 만난 순간에 다시 시작된 하나님과의 만남이 내 삶을 지키고 한 걸음씩 다시 나아가게 한 소중한 힘이 된 것이었다. 어린 시절 교회에 다녔지만 학창 시절 이성이 강해진 나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고3때 대학입시를 앞두고 긴장과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알게 해 달라 간절히 매달렸고, 성경 공부를 하며 인간의 죄를 대신해 담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다. 이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걷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의 무게와 고통은 버겁고 때로는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삶은 모두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여정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화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많은 기회를 주고 품어 주고 안아 주며 새 힘을 주었다. 40대 중반, 뒤늦게 국제대학원에 입학해 해외 컨퍼런스 연구 발표와 학회 설립·개최를 경험하며 한계를 넘어 성장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마주한 것은 기대했던 ‘더 멋진 나 자신과 더 멋진 삶’이 아니라, 인생의 참된 가치인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하는 아가페를 향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 옥상에 올라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산과 하늘을 바라보며 어른이 된 나의 모습과 끝없이 펼쳐진 세상을 꿈꾸던 기억이 있다. 저 멀리 미지의 세상과 아름답고 멋진 삶을 꿈꾸며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조금이나마 깨닫는 것은 삶의 가장 큰 교훈은 먼저 나 자신을 포함해 ‘사랑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하는 사랑, 즉 결코 쉽지 않지만 ‘아가페’를 경험하고 실천해 나가는 삶이라는 것이다. 사랑할 만한 것, 사랑하고 싶은 것, 사랑해야 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삶은 그를 넘어 사랑할 이유 없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까지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성숙과 성장의 길로 이끈다.

이 교훈은 오늘 아침 예배 설교 말씀을 통해 다시금 확인한 내용이기도 하다. 수많은 좌절과 실패, 고통,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더라도 이화인들은 그 사랑을 배우고 전하며 자신과 세상을 밝히 비추기 위해 부름받은 은혜로운 존재라 생각한다. 무언가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 않아도 작은 노력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리고 오늘 하루 소박하지만 환한 미소를 나누는 이화의 벗들로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