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치매와 실어증: 언어를 잃어가는 것과 회복하는 과정
‘치매’라는 단어는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반면 ‘실어증(Aphasia)’은 비교적 낯설고, 들어본 적은 있어도 치매와 어떻게 다른지, 어떤 증상을 말하는 것인지 선뜻 설명하기 어려운 용어일 수 있다.
‘실어증(失語症)’이라는 한자어를 들여다보면, 다소 무겁고 무시무시한 뜻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언어를 잃어버리는 증상이라는 의미다. 영어 용어인 ‘Aphasia’ 역시 비슷하다. 접두사 ‘a-’는 ‘없다’를 의미하고, ‘phasis’는 ‘말’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결국 실어증은 ‘말을 할 수 없는 상태’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실어증 환자들은 정말 언어를 완전히 상실한 것일까? 언어를 잃어버린다면 다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바로 이러한 질문이 언어재활의 핵심이다.
나는 지난 15년 넘게 언어병리학과 대학원에서 <신경언어장애> 과목을 강의하면서, 치매로 인한 언어장애와 실어증으로 인한 언어손상의 공통점과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언어치료 전문가 교육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늘 강조해 왔다. 두 질환은 모두 언어와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생긴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원인과 경과, 회복 가능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치매와 실어증은 모두 언어와 의사소통 능력에 손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인다. 실제로 최근 헐리우드 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실어증’ 진단을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측두엽 치매(원발성 진행성 실어증)’라는 보다 복잡한 진단명을 언론을 통해 알리면서, 대중들이 두 용어를 혼동하는 경우가 더욱 늘었다.
2022년 3월, BBC는 ‘브루스 윌리스, 실어증으로 은퇴 선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뇌졸중으로 인한 실어증 때문에 의사소통과 인지 능력이 손상되어 더 이상 연기 활동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1년 뒤인 2023년 2월, CNN은 그가 전두측두엽 치매 진단을 받았다고 발표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말 전혀 못하는 상태”라는 제목의 기사까지 나왔다. 불과 1~2년 사이 빠르게 악화된 그의 사례는 실어증과 치매가 어떻게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용어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게 만드는 혼란의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모든 실어증이 치매로 진행할까? 실어증은 항상 이렇게 빠르게 나빠지는 질환일까? 두 질문의 답은 모두 “아니다.”
예컨대 영화 '미나리'에서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순자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인한 실어증 증상을 보인다. 브루스 윌리스와 마찬가지로 뇌손상으로 인해 언어가 손상되었지만, 영화 속 할머니는 점차 회복하면서 일상생활을 이어간다. 즉, 실어증은 손상된 뇌가 회복하면서 언어 기능도 회복될 수 있고, 언어치료를 통해 호전을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치매의 경우에는 회복보다는 점차 악화되는 경과를 보이며, 언어치료 역시 증상을 되돌리기보다는 진행을 늦추거나 일상생활을 돕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처럼 실어증과 치매는 원인, 출발 시점, 증상의 진행 속도와 회복 가능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실어증은 갑작스러운 뇌손상(예: 뇌졸중)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생길 수 있지만, 회복과 재활의 여지가 있다. 반면 알츠하이머성 치매처럼 서서히 뇌가 위축되면서 나타나는 경우는 언어와 인지 기능이 점점 악화되어 회복이 어렵다.
언어와 의사소통은 인간이 가진 가장 고차원적 인지 기능 중 하나이며, 삶의 질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다. 언어 능력이 손상되면 단순히 말하기가 어려워지는 차원을 넘어, 가족과의 관계, 사회 속 정체성, 나 자신에 대한 인식까지 흔들리게 된다. 노화, 뇌손상, 신경퇴행성 질환 등 다양한 원인으로 누구나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한국 사회는 빠른 고령화로 인해 치매 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언어·인지 문제를 정확히 평가하고 치료할 수 있는 전문가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러나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서 고립되는 경우가 많고, 장애에 대한 낙인 역시 여전히 크다. 실어증 환자나 치매 환자를 다시 지역사회로 불러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학계와 지역사회의 연계 활동이 더욱 중요하다. 해외에서는 대학 연구진과 언어치료사가 함께 포커스 그룹이나 커뮤니티 모임을 만들어, 환자와 가족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한 치료를 넘어, 환자가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과정이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AI)이 언어 재활 과정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음성인식과 자동 분석 기술을 활용하면 환자의 언어 변화를 정밀하게 추적할 수 있고, 태블릿이나 모바일 앱을 이용한 언어 훈련은 집에서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다. AI는 대화 파트너가 되어 환자에게 반복 훈련을 제공하고, 개별적인 맞춤 피드백을 줄 수도 있다.
우리 연구실에서는 이러한 의사소통 훈련 콘텐츠를 개발해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에 접목하고, 실제 언어 재활에 적용하는 학제 간 융합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뇌신경자극(neuromodulation) 기법과 언어 재활을 결합해 뇌·언어·인지 기능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연구도 추진 중이다.
이화여대가 가진 학문적 역량과 풍부한 인적 자원은 이러한 연구와 교육을 선도할 수 있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노인을 포함한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언어 재활과 디지털 치료 서비스 분야에서, 이화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치매와 실어증은 단순한 의학적 용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족이나 본인의 삶 속에서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현실적 문제다. 언어와 삶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문가, 그리고 사회적 지원 체계가 더 많이 필요하다. 이화의 학생들이 언어와 뇌, 그리고 사람의 삶을 연결하는 이 중요한 과제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해 주길 바란다. 언어를 잃어가는 이들에게 회복의 길을 열어주는 여정에, 이화가 앞장서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