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E열] 동질성의 균열과 ‘우리’의 붕괴

2025-09-07     김지수 선임기자(커미・21)
출처=영화사 진진

두 사람이 이별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성격이 맞지 않아서,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서, 혹은 서로를 향한마음이 식어서. 그러나 꽤 많은 경우, 이별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다르다”라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일 수 없음을 인지하는 순간, 관계는 흔들리고 세상은 균열한다.

‘해피엔드’의 유타와 코우는 성인이 되기를 앞둔 청소년이다. 오랫동안 함께 자라며 테크노 음악과 친구들 속에서 거침없는 시간을 보내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의 세계는 다른 궤도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늘 해오던 장난처럼 보였던 사건—새벽에 교장의 스포츠카를 교내에 세워놓는 행위—을 빌미로 교장은 인공지능 감시 기술‘판옵티’를 도입한다. 부유한 친모 밑에서 자란 일본 국적의 유타는 이 감시 시스템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국민’인 재일한국인 코우는 다르다. 판옵티는 언제나 그를 붙잡고, 그를 표적 삼는다.

클럽 장면은 이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경찰이 들이닥치자 사람들은 황급히 빠져나가지만, 유타는 음악에만몰입해 무심히 남아있다. 코우는 그런 유타 곁에 머물지만, 결국 경찰에게 ‘특별 영주 증명서’를 요구받는다. 소지 의무가 없다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증명서는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며 사회가 그어놓은 경계선을 상기시킨다. 유타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코우에게는 존재적 장벽의 시작이 된다.

세상은 오랫동안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우리’라는 담론을 유지해 왔다. 같은 얼굴, 같은 언어, 같은 생활양식은사회적 안정감의 토대가 됐다. 그러나 ‘해피엔드’는 동질성의 기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교실에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앉아 있지만, 제도는 그 차이를 공고히 하며 배제와 차별을 정당화한다. 겉으로코우는 유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비국민’인 그는 일본 자위대 특강에 참석할 수 없다. “너와 나는 같지않다”라는 선언은 개인적 이별을 넘어 사회적 관계의 해체로 이어진다.

영화의 제목은 ‘해피엔드’이지만, 이야기가 전하는 감각은 그 반대다. 우정은 파열되고, 사회적 경계는 선명하게드러난다. 그러나 영화는 이 파열을 절망으로만 남기지 않는다. 지진이 보여주듯, 거대한 재해 앞에서는 누구도차이를 주장할 수 없다.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기우는 순간, 국적이나 신분은 무의미해진다. 결국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동질성의 유효 기한이 끝났을 때, 오히려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이열린다. 영화는 불편한 균열 속에서 다른 연대의 방식을 모색하게 한다.

‘해피엔드’가 개인적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감독 네오 소라의 배경에서 알 수 있다.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자란 그는 이방인이라는 정체성과 친밀했다. 감독은 ‘해피엔드’의 포스터 판매 수익을 팔레스타인 가자 주민에게기부하고, 길거리로 나가 시위에 참여한다. (실제로 감독의 인스타그램 피드는 작품 반 시위 반으로 이뤄져 있다.)

유타는 더 이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코우에게 소리친다. “네가 시위에 나간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그것은 유타의 질문이자, 코우의 질문이자, 어쩌면 감독 자신이 오래 붙들고 있는 물음일 것이다. 하지만 길 위에서 목소리를 낸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사회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변화를 향해 몸을 던진 이들의 외침이 쌓여 오늘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영화는 환기한다.

‘해피엔드’가 던지는 물음은 단순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동질성 이후의 시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영화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균열 속에서 잠시 멈추게 하고, 흔들리는 땅 위에서 우리가여전히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체감하게 만든다. ‘해피엔드’는 완벽한 화해나 화합을 뜻하지 않는다. 차이를 지워버린 일체감이 아니라, 차이를 안은 채 불완전하게 이어지는 연대 속에서 겨우 시작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불안한 자리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 그것이 영화가 말하는 진짜 해피엔드에

 

가까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