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E열] 미야자키가 남긴 질문: 우리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

2025-08-24     김인소(도예·22)

“너는 무엇을 지키려 하느냐?” 늑대에게 길러진 소녀 산의 목소리로 던져진 질문과 함께 이 영화는 시작된다. 중세 일본, 인간의 개발이 본격적으로 숲을 침범하던 시대, 한 청년 아시타카는 저주받은 팔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운명을 풀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과 파괴 사이의 첨예한 갈등이었다. 숲의 신들, 철을 캐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숲을 지키는 산의 치열한 싸움 속에서 사건은 단순히 저주를 풀거나 한쪽의 승리를 보는 이야기로 귀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만을 남긴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아시타카가 숲과 마을, 인간과 신 사이를 오가며 벌어지는 갈등을 조율하려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 해결과는 멀어지고, 오히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더욱 복잡해진다.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철과 숲의 생명을 대표하는 신들의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렵게 만든다. 전투와 협상은 명확한 결론 대신, 서로의 상처와 불신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결국 이야기의 쟁점은 숲이 파괴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공존의 의지를 가졌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옮겨간다.

타타라바를 이끄는 에보시 고젠은 한편으로는 병자와 기녀들을 품고 보호하는 지도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숲을 무너뜨리는 파괴자의 얼굴을 갖는다. 늑대에게 자라 숲을 지키려는 산은 인간을 철저히 적대하지만, 동시에 인간인 아시타카와 마음을 나누며 자신의 정체성에 균열을 맞는다. 숲의 신 시시가미는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다스리는 존재로, 선악의 이분법을 무력화한다. 관객은 단순히 ‘누가 옳은가’를 판단하는 대신, 인간과 자연, 생명과 파괴 사이에 놓인 관계의 복잡성을 마주하게 된다.

아시타카는 끊임없이 “증오가 아닌 눈으로 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영화 속 진실은 단순히 관찰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숲을 지키려는 의지와 인간 사회를 유지하려는 욕망은 모두 이해 가능한 이유를 지니며, 그 사이에서 ‘옳음’은 선택의 문제로만 남는다. 모노노케 히메의 세계에서 진실은 절대적이지 않다. 숲의 죽음과 인간의 번영, 산의 분노와 에보시의 결단은 모두 관객의 믿음과 해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 영화에서 진실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선택되는 것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모노노케’란 말은 단순히 산을 지칭하는 이름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갈등 속에서 낯설게 된 존재 전체를 의미한다. 인간이 숲을 해부하고 자원을 추출하는 과정은 곧 자연을 대상화하는 폭로이자, 숲의 신들과 인간 사이의 불신을 강하게 만든다. 해부란 숲을 갈라내는 것이 아니라, 숲의 파괴 과정이 인간과 자연 모두를 해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의 ‘해부’는 단순한 저주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어떤 얼굴을 드러내는가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결국 이 싸움을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새로운 선택이다. 아시타카와 산은 서로의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면서도,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 길을 택한다. 산은 인간 세상과 거리를 두지만, 아시타카와의 연을 완전히 끊지 않는다. 아시타카는 마을에 남아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다리를 놓으려 한다. 두 사람의 선택은 불완전한 화해이자, 미래로 이어지는 가능성이다. 이들의 선택은 완벽한 화해가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갈등과 긴장이 남아 있으며, 서로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 진정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은 한쪽의 승리나 타협이 아닌, 끝없는 대화와 공존의 길을 택한다. 그 불완전한 화해야말로 미래로 이어지는 유일한 희망이며, 인간과 자연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관계의 초석이 된다.

〈모노노케 히메〉는 관객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을 지키려 하느냐?” 아시타카의 여정과 산의 고뇌는 단순히 시대극 판타지를 넘어서, 오늘날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숲을 지키는 일은 단지 환경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이 자기 존재를 지켜내는 일과도 직결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숲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못했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하지만 폐허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움트듯, 함께 살아갈 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완전한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남겨진 흉터 위에서야말로 앞으로의 공존이 시작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모노노케 히메〉는 결국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관객에게 질문을 남긴다. 인간이 자연과 맞서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고 또 무엇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말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열린 질문 속에서 영화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 성찰의 거울로 남는다.

출처=스튜디오지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