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흔들리던 나날들이 사실은 다 모험이었어”, 고선경 시인의 청춘일기

2025-06-01     정보현 기자

“여름은 저의 기운과 닮아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여름은 다 드러나는 계절이에요. 표출되고 맹렬하게 펼쳐지는 계절인데 제가 가진 정서나 기질이 이런 여름과 닮아 있지 않나 싶어요.”

햇볕이 쨍쨍해지는 6월, 정수리가 달궈지고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여름이 왔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마구 열을 발산하는 여름과 닮은, 일기부터 생각 조각까지 모두 토해내놓은 자신의 세계에 가끔만 놀러 오라는 독특한 사람이 있다. ‘샤워젤과 소다수’, ‘내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을 펴낸 시인 고선경씨가 여름의 초입에서 산문 ‘내 꿈에 가끔만 놀러 와’로 돌아왔다. 고씨를 5월24일 그의 단골 카페 ‘윤숲’에서 만났다.

고선경 시인의 방황하던 20대 시절 이야기가 담긴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진유경 사진기자

“저는 자존심이 세고 천방지축이지만 어딘가 조숙해서 생각도 많은 아이였던 것 같아요”

고씨의 산문집은 ‘꿈결처럼 허무맹랑하고 허점투성이인, 불완전한, 우리 누구나 지닌 엉망진창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대는 ‘별 게 다 서러운 시기’다. “돈 없어서, 친구 없어서, 애인 없어서, 안 풀려서, 엄마 아빠 때문에 서럽고, 별 게 다 서럽거든요.” 고씨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계속 마주하는 것이 가장 서러웠다며 20대를 “모자란 부분은 극대화되고 자꾸만 자신감을 잃어가기 쉬운 시기”라고 표현했다. 고씨가 이 시기 가장 많이 잃었던 자신감은 다름 아닌 ‘살아갈 자신’이었다고 했다.

전주가 본가인 고씨가 서울 소재 대학을 진학하며 처음 살게 된 집은 고시원이었다. 어머니가 고시원 방 청소를 해주고 전주로 돌아가던 날, 애써 담담한 척했지만, 그는 엄마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그 고시원에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며 산문집 속 ‘칠리’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처음 자신의 고시원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칠리’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등장인물처럼 “언니, 여기서 사는 거야?”라며 울음을 터뜨렸던 일을 회상했다.

서울에서의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전주로 돌아갔을 때 고씨는 너무나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는 “애초에 내가 전주를 벗어나지 않았으면 모르겠는데”라고 말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너무 바보같이 세월을허망하게 보내다가 돌아온 기분이어서 전주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많이 울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전주로 돌아간 그는 1년 반 동안 시만 썼다. 그러다 2022년, 고씨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수상하며 덜컥, 등단했다.

등단한 그에게 정끝별 교수가 전화를 걸었다. “너 하는 거 없지, 대학원 와라.” 고씨는 그렇게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하지만 현재 그는 대학원 제적 상태다. 그는 대학원을 그만둔 이유를 “대학원은 저를 창작자로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연구자로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시를 연구하는 대학원에서 창작자로서의 자신이 부적격자라고 느껴졌다. 그는 대학원에서의 추억을 말하며 “그래도 재밌었다”고 미소 지었다.

계속된 작품 활동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MZ 시인’으로 불릴 때마다 고씨는 자꾸만 증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수식어를 달고 강연에 나서면 스스로가 왜 베스트셀러 작가인지 증명해야 했다. ‘본인이 왜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생각하세요?’, ‘왜 본인이 MZ 시인이라고 생각하세요?’,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다독이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뭐가 괜찮아?’라는 마음이 불쑥 나타났다. MZ 시인으로서 유머러스함이 자주 언급되지만, 최근 그가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면은 “소위 말하는 깊이”다. 그는 최근 깊이에 대한 생각들을 한다며, 자신이 가진 깊이도 봐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다사다난한 20대를 보낸 고씨는 ‘내가 딛고 선 것이 무엇인지 알기보다는 무언가를 딛고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믿고 싶다’고 산문집 머리말에 적었다. “너무너무 길었던 나의 방황과 매일매일 흔들리던 나날이 사실은 다 모험이었어, 해버리면은 조금 가뿐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의 여름으로 걸어가요, 씩씩하게!

‘무한히 터지는 기포를 담아’라는 문구와 함께 싸인을 하고 있는 고선경 시인의 모습. 진유경 사진기자

꿈결처럼 파스텔톤으로 알록달록한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의 표지는 이소연 작가의 작품이다. 일기와 메모가 담긴 산문집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4부로 구성됐다. 1부 ‘아침에 일기를 쓰는 건 기분에 좋다’는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조금 긴 자기소개”로, 주로 일기다. 2부 ‘시는 써야겠고, 슬프네’는 시에 관한 이야기와 여름이라는 계절성에 대한 글이 담겼다. 3부 ‘심장을 꺼내 보이지 않아도 괜찮아’ 는 고씨가 힘들었던 시기와 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 극복하지는 않더라도 그 시기를 통과하는 과정을 담았다. 4부 ‘그래, 이것을 첫눈으로 여기기로 한다’는 고씨를 둘러싼 그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그의 지배적인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4부는 ‘친구가 많다는 건 외롭지 않다는 게 아니라 내가 외로운 걸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 삶은 정말 이상하게 흐르는데 그것이 우리의 평범함을 증명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고씨는 이 글을 쓸 당시, “(친구들에게) 조금 삐져 있었던 것 같다”며 설명을 더했다. ‘내 외로움을 친구들이 알까’, ‘친구들이 이 외로움을 알아줬으면, 밖으로 끌어내 줬으면’하는 마음이었다고 했다. 이어지는 문장에 관해 고씨는 “삶은 진짜 이상하고 가끔은 치사한데 사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종종 불행이나 행운 앞에서 특별해진 기분을 느끼곤 하지만, 그런 특별한 기분 자체가 사실 우리가 평범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고씨의 다음 책은 12월에 나온다. 열두 시인의 열두 달 릴레이 산문집을 편찬하는 ‘시의적절’ 시리즈에서 12월을 맡아 매일 한 편씩 읽을 수 있게 31개의 꼭지의 글을 엮은 책을 출판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