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칼럼] 레디메이드가 아닌 실재와 내일에 대한 희망
“진리가 없단 말인가? 모든 지적 탐구는 허망한 일인가?” 학생들로부터 매 학기 받는 질문이다. 이에 이 지면을 빌어 절대 그렇지 않은 이유를 적어보려 한다. 이를 위해 학생들이 왜 위와 같은 의문을 품게 되는지부터 봐야 할 것이다. 그 원인은 필자의 주요 연구 영역인 지식사회학, 특히 과학지식사회학에 있다. 과학지식사회학은 진리. 더 나아가 그 대상인 자연의 실재,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그 정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짧은 글에서 실재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사회학적 분석이 필요한 지점까지는 갈 수 있고, 여기에 도달하면 왜 위 의문이 제기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목적지는, 라투르(Bruno Latour)와 울가(Steve Woolgar)가 실험실 연구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자면, “실재는 논쟁 종식의 원인이라기보다 그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부터 이해해 보겠다.
과학 연구는 자연의 실재에 대한 추측인 이론적 가설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추측이 자연의 실재에 대응하는지 검증한다. 이를 위해 실재를 확인해야 하는데, 인간이 이를 확인할 방법은 (관찰 도구의 도움까지 포함해 형성된) 감각 경험밖에 없다. 그런데 감각은 관찰자와 관찰의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통제된 조건을 조성해 반복된 관찰을 수행하는 실험을 설계하게 된다. 이론적 가설이 이 실험 결과에 대응하면 진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그런데 실제 연구 과정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실험 실습을 해본 경험이 있다면, 실험 결과가 교과서 대로 나오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래도 교과서에 나오는 실험의 경우 참인 결과가 결정돼 있어 이로 인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논쟁 중인 과학자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실험 실습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새로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을 설계해 수행한다. 이 극히 어려운 작업의 결과가 일관적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이 비일관적인 실험 결과 중 어떤 것이 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논쟁 중인 과학자들은 어떤 실험 결과가 참인지부터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어떤 실험 결과가 참인지는 당연히 실재를 준거로 판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실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자연 스스로 말하지 않는 그 실재를 확인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바로 해당 실험이다. 즉, 논쟁 중인 과학자들이 실재를 확인할 방법은 처음 시도하고 있는 실험밖에 없다. 이처럼 어떤 실험 결과가 참인지 알기 위해서는 실재를 알아야 하고, 실재는 오직 해당 실험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 실재와 실험 사이의 끝없는 순환이 과학지식사회학자 콜린스(Harry Collins)가 “실험자 회귀”라 칭한 것이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각자 자기 이론적 믿음에 따라 실험 결과의 진위를 해석하게 된다. 이론적 믿음에 따라 실재가 달라지는 셈이다. 이것이 실재가 논쟁 종식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자연의 실재가 논쟁을 끝내지 못한다면, 이는 어떻게 종식되는가? 답은 하나다. 논쟁은 과학자들, 즉, 인간들에 의해 종식된다. 이와 함께 승리한 지식이 진리로 수용되고, 이에서 그린 자연의 모습이 곧 우리 인간에게는 실재가 된다. 이것이 실재가 논쟁 종식의 결과란 뜻이다. 자연이 저항하는데 어떻게 인간들에 의해 그 실재가 결정된단 말인가? 물론 자연은 저항한다. 하지만 자연의 저항을 아무 노력 없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문제에서 논쟁이 일어나겠는가? 논쟁은 그렇지 않은 진짜 어려운 문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를 반영하는 진리는 없고, 따라서 인간의 모든 지적 탐구는 허망한 일인가? 이 글을 연 의문에 도달했다.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실재가 인간 경험 너머에 불변의 모습으로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인간이 실재를 확인할 방법은 도구의 도움까지 포함해 형성된 감각 경험밖에 없다. 그 너머에 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수밖에 없다. 제임스(William James)가 논했듯, 실재는 불변의 레디메이드가 아니라, 경험과 함께 탄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경험을 가능케 해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일은 상상력의 산물인 추측에서 시작한다. 이런 추측과 이를 증명하려는 노력이 바로 인간의 지적 탐구 아닌가? 그렇다면 이는 허망하기는커녕 인간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실재를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위대한 과정이다. 실제로 인류는 인류가 탄생한 우주에는 없던 것을 실현해 왔다. 이와 함께 인간 자신도 새로운 존재로 끊임없이 재구성해 왔다. 이렇게 우리를 새로운 실재들의 창조로 성공적으로 이끈 추측들의 이름이 진리다.
이처럼 실재는 레디메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상상하고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지식사회학은 실재란 레디메이드가 아닌 사회적 구성물이란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더 나은 내일에 대한 상상의 발판을 마련한다. 그래서 지식사회학, 더 나아가 사회학은 희망의 학문이다. 이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이화의 학생들에게 늘 전하고 싶은 바다. 물론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지는 내일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고 믿자. 이 믿음 덕분에 날 수 없던 인간은 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고 실제로 날게 됐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여러분을 실제로 오늘보다 나은 새로운 내일로 이끌 것이다.
Solvitur ambulando.